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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27 조회수1,406 추천수2 반대(0) 신고

 

 

부르심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사도

(로마1:1)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왜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그림 같다는 말을 할까요?’ 언젠가 그림을 그리는 제자가 제게 했던 말입니다. 그림이 허상이고 풍경이 실제임에도 우리는 풍경보다 그림을 더 가치 있게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유사가 본질을 구축하는 형국입니다.

무엇이든지 형식화하여 라는 나라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소유함으로써 오로지 자신의 나라를 살찌우는데만 총력을 기울이며 사는 인간들의 죄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그런 표현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혼돈으로 변화로 감지가 되는 것, 자신이 감당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형식화하고 고정화하여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 거기에서 안정을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거하는 장소를 우상화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매주 성당에 오셔서 지난주와 꼭 같은 자리에 앉으시는 것이 바로그러한 장소의 우상화, 장소의 고정화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사5:8) 8 불행하여라, 빈 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해 가고 밭에 밭을 늘려 가는 자들! 너희만 이 땅 한가운데에서 살려 하는구나.

인간은 빈틈, 즉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가운데에서 홀로 대장이 되어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자리 고정화, 고착화의 삶을 추구하며 그곳에서 안정을 구하는 불안한 인간들의 본능적 죄 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천국도 자기들의 행위를 근거로 형식화 해 버립니다.

천국이라는 장소에 대해 듣기는 들었는데 거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니까 자신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그런 곳을 그리 며, 자신들의 힘으로 그곳을 쟁취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그러한 제한과 형식화로 모든 것을 자기 존재를 살찌우려하는 인간들의 죄성은 하느님마저도 성전에 가두려 하지요? 그게 천국이라는 장소를 우상화하여 자신들의 행위로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형식화해 버리고 고정화해 버리는 인간들의 죄 성의 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하느님은 어찌 내가 인간이 지은 집에 가두어 질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형식화 와 고착화의 노력은 역사 전체를 관통하며 인간의 보편적 특징으로 들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실물의 풍경보다 그림이 더 가 치 있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풍경은 자기 안에 그림으로 형식화 되어 소유가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풍경 은 내 안에 가둘 수 없어 버거운 존재가 되는 것이고 형식화시켜버린 그림이나 사진 속의 풍경이 더욱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 아닐 수 없지요? 맞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현실을 버거워 하는 인간들의 가상현실의 추구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간들의 그러한 형식화 와 고정화에서 비롯된 가상현실의 추구가 천국에 대한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멋지게 둔갑하여 마치 훌륭한 신앙인의 지표로 삼아지고 있다 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제자의 그 말을 들으면서 떠 올린 사람이 미디어 아트의 대가인 제프리 쇼였습니다. 현존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중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현존하는 사람이지만 이미 미술사 책에 그의 이름과 작품이 기록이 되어 있을 만큼 그는 탁월한 작가입니다.

제프리 쇼는 아티스트라기보다 과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Legible City(읽을 수 있는 도시)’는 관객 이 자전거를 타고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관객은 자전거를 타고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여러 도시를 구석구석 구경하고 탐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짓궂은 관객이 자전거를 탄 채로 벽이라도 들이받을라치면 그만 몸이 벽을 통과해 버리고 맙니다. 그 사람은 순간 육체에서 벗어나 유령이라도 된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신체가 작품 속에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신체의 현존을 자각하면서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로 돌아오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객은 제프리 쇼의 작품 속에서 여행을 하면서 자기의 신체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다가 다시 신체로 돌아오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신체와 현실을 벗어나서 가상의 공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가상현실, 혹은 그보다 더 발전한 증강현실, 혹은 혼합현실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디어 아트를 상업용으로 사용하여 큰 성공을 이룬 것이 닌텐도 위(nintendo wii)입니다. 소비자가 게임기 속으로 들어가서 볼링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춤도 추고, 전쟁도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움직여 가며 가상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 운동도 하고 놀이도 즐기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첨단의 게임기가 탄생하게 된 단초 인물이 바로 제프리 쇼입니다. 제프리 쇼는 이제 21세기 이후의 인류는 pata physical species, 즉 과학과 은유가 뒤섞인 상태,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상태를 사는 존재가 될 것이라 말을 했습니다. 그건 은유(metaphor)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가 현실이라면 장기판 위에서 장기 알을 가지고 이리저리 달리며 전쟁을 하는 것은 은유 (metaphor)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장기판 위에서 작은 사람들이 진짜 전쟁을 하는 것을 파타포(pataphor)라 하는 것입니다. 헤리포터라는 소설 속에서 헤리포터 일행이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체스 말들과 일전을 치르는 그런 장면을 떠 올리시면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루이스 캐럴이 그러한 파타 피지컬을 소재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소설을 쓴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혼합현실 속에서 진짜 현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실종이 되 어 버리는 것입니다. 영화 메트릭스가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될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종자들이 가상현실 속에서는 재미있게 즐기던 것을 현실 속에서 던져주면 손사래를 친다는 것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몸을 이리 저리 움직여 가며 자동차 경주 게임을 하고 있던 남편에게 장거리 운전을 시키면 짜증을 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는 밥도 안 먹고 심지어 밤까지 새면서 열심히 운전을 하던 사람이 현실 속에서 운전대를 쥐어 주면 짜증을 낸 단 말입니다. 가상현실 속에서 열심히 적군을 찾아 방아쇠를 당기던 아이에게 군대 영장이 나오면 어금니를 뽑던가, 팔을 뽑던가, 검지 손가락을 자르면서까지 군 면제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진짜 현실에서는 자꾸 탈출을 하고 탈주를 하려하고 가상의 현실 속으로 숨으려 합니다. 그러한 현상은 제프리 쇼의 예언처럼 21세기 이후에 나타날 현상이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 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이 그때부터 살던 삶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를 차압당한 뒤, 저주 아래에 놓여진 이 세상에서 pata physical species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이 세상의 현실이 인간들에게는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역사와 현실을 형식화하고 조작을 하여 그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추구는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들켜집니다. 조금 더 나아가 볼까요?

지금 여러분 가슴 속에 곱게 감추어둔 그리움이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보세요. 너무 아름답고 가치가 있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지 몰랐잖아요?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아쉽고 그런 거지요?

그 말은 그러한 그리 움이나 추억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현실로 주어진다 해도 여러분은 그때와 똑같이 그 순간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없다는 말인 것 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움에 울고 추억 속에서 아파합니다.

실제로 그립고 그립던 것을 진짜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정말 그렇게 좋던가요? 그리고 그 좋음이 얼마나 지속이 되던가요? 왜 인간은 그리움이나 추억을 현실보다 더 크게 가슴 속에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요? 역시 자기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형식화하고 고정화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움과 추억 은 항상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세상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하느님의 저주 아래 던져졌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현실 속에서 늘 사망의 증상들을 접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저주로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땅의 현실과 질병과 늙음과 변화와 혼돈이라는 썩어짐의 과정들을 목도하면서 인간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림 속의 풍경에는 나타나지 않는 벌레와 진드기와 송충이와 짐승들의 배설물을 현실 속에서는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진짜 풍경보다 그림이 더 좋은 것이고 진짜 현실보다 가상의 현실이 더 좋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자꾸 가상의 현실에 더 가치를 두고 그 가상과 유사 속으로 숨으려 하는 것은 더러운 죄와 죄의 증상들과 결과물들이 현실 속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털어버린 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형식화 해버린 가상의 그림과 가상의 현실 속으로 수시로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자기들이 조작하고 형식화 해 놓은 세상을 진짜 로 착각을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각자가 상정한 가짜 세상을 살면서 엉뚱 한 상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이 눈이 멀었다, 소경이다, 어두움 속에 산다라고 합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빛이 찾아오는 것을 부르심이라고 하고 그것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진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형식화 하고 조작한 혼합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빛이신 예수가 찾아오셔서 눈을 열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로 내 동댕이쳐 버리는 것입니다. 게임 그만하고 현실을 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눈이 열린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제일 먼저 들어오게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입니다.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 스스로 이 되어 버린 후에 자신들의 가치를 챙기기 위해... 자신들의 더러움과 그들이 집단적으로 배설해 놓은 더러운 오물 같은 역사를 선하고 아름답게 위장하기 바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역사 낙관론이니 역사 진화론이니 너스레들을 떨면서 신이된 인 간의 위상을 한껏 찬양하며 삽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여 어떤 무리의 눈을 열어, 하느님의 은혜가 떠난 피조 세계의 실상 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입에서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부르심과 보내심에 대해 공부를 할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파울로스, 작은 자로 편지를 시작한 사도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를 한 후 자신은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을 연이어 붙이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자기 자신의 자발성을 전부 부인하고 부정하는 말입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여전히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었 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은 보내심을 입은 사도라고 합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 말도 역시 누군가가 자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다른 말로 사도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절대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을 함의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심이라는 말과 보내심이라는 말 모두가 인간의 가능성과 자발성을 부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바로 그 단어들을 끌어다가 자신을 소개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사도 바울이 사도로, 보내심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는 장면으로 가보겠습니다.

(사도9:1-9)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사도 바울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기세가 등등하여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열심을 부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요한12:39~40) 39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을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40 “주님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였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눈이 멀었다예수를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진짜 빛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의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 말은 그동안 바울이 보던 세상은 진짜 세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을 진짜 세상으로 바라보던 바울의 눈은 사실은 멀어 있었던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이 먼 자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된다고요? 예수를 핍박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핍박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만을 의지하여 존재가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절대 의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예수를 핍박한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세상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것을 예수를 핍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빛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바로 그러한 어두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 어두움의 세계에서 눈이 멀어 살던 자들을 빛의 세계로, 다시 말해 은혜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걸 부르심이라 합니다.

그렇게 성도에게 찾아와 성도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는 은혜의 빛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창세기 1장입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사도행전 9장의 사도 바울의 부르심의 장면까지 달려가면 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없음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게 되는지 잘 알게 됩니다.

(창세1:2-5)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는데 그 배경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어두움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두움에 빛이 비추는 것이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 일이 지금 사도 바울의 인생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멀어 어둠 속을 헤매던 사도 바울에게 빛이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시고, 그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구원의 이야기가 창세기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도 바울의 부르심의 사건은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어떤 한 무리에게 일어날 일의 작은 모형인 것이고요.

창세기 1장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이던 세상에 빛이 비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제일 먼저 어두움이 빛에서 나뉩니다. 그 말은 숨어있던 어두움이 빛에 의해 어두움으로 발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빛의 반대편으로 분리가 된 그 어두움을 밤이라고 부르십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이 잡히시던 때도 밤이었고,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위해 나갔던 때도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온 세상이 세 시간 동안 밤이 되었던 것도 머릿속에 잘 넣어 두세요. 그렇게 밤은 빛과 낮을 대적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 위에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어두움을 빛에서 분리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셋째 날에 창조가 되는 씨 맺는 채소들을 키워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빛입니다. 채소는 태양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비로소 생육이 가능한 것인데 그 태양은 넷째 날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도 셋 째 날 창조된 채소는 태양이 아직 없는 데도 존재가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그 셋째 날의 채소들은 태양의 빛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의 원형인 첫째 날의 그 빛에 의해 존재하고 자라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어두움을 분리시켜 갈라내고 이 세상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생육케 하는 그 빛은 무엇일까요?

(요일1:5) 5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전6:15-16) 15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16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보시다시피 만물을 밝히시고 만물을 존재케 하시는 빛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두움과 절대 섞일 수 없는 빛이십니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만물이 존재하고 유지됩니다. 만물에 그 빛이 비추일 때..... 비로소 만물은 존재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첫 창조 때 빛이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빛은 하느님이고, 하느님의 영광이며,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이 모든 창조의 첫 머리에 등장한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에 의해,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여 창조가 될 것이며, 그 창조는 어두움을 갈라내어 밀어내 버리는 창조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첫 창조 때의 빛입니다.

그런데 민수기로 가면 그 빛을 하느님의 얼굴이라고도 합니다.

(민수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보시다시피 민수기에서는 하느님의 빛을 하느님의 얼굴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얼굴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파님입니다. 히브리어 파님임재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창세기 38절에서 그대로 쓰여 집니다.

(창세3:8) 8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하느님의 앞을 피했다고 하지요? 그 앞()이 바로 파님, 임재, 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지금 범죄를 저지른 후 빛을 피해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 죄악의 상태를 성경이 뭐라고 묘사를 하는지 보자고요.

(이사59:9-10) 9 그러므로 공정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정의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건만 어둠만이 있고 광명을 바라건만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10 우리는 눈먼 이들처럼 담을 더듬는다. 눈이 없는 이들처럼 더듬는다. 대낮에도 캄캄한 듯 비틀거리고 몸은 건강하다고 하나 죽은 자들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 세상을 흑암, 어두움이라고 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소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 속에 갇혀 버린 소경들이 빛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1:1-5)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느님의 낯을 피해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 버린 인간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을 지켜 줄 안전한 성을 쌓은 것입니다. 카인의 에녹성, 그 후에 지어진 바벨 성, 그 모든 것들이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 자리 고정화, 고착화, 형식화의 노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자들을 건축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자리의 고정화와 안정화를 위해 각자 자기의 성을 건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소경입니다. 풍경을 보고 그림 같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 세상을 흑암, 어두움이라고 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소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두움 속에 갇혀 버린 소경들이 빛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사42:6~7,16)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16 나는 눈먼 이들을 그들이 모르는 길에서 이끌고 그들이 모르는 행로에서 걷게 하며 그들 앞의 어둠을 빛으로,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리라. 이것들이 내가 할 일 나는 그 일들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여기에서 는 성자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빛으로, 이 어두움의 세상으로 보내셔서 흑암에 갇혀 소경으로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이사60:1-3,19-22)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2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19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20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고 너의 달이 사라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이제 네 애도의 날들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21 너의 백성은 모두 의인들로서 영원히 이 땅을 차지하리라. 그들은 나를 영화롭게 하려고 내가 심은 나무의 햇순이며 내 손의 작품이다. 22 그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한 부족을 이루고 그들 가운데 가장 하잘것없는 이가 강대한 민족이 되리라. 나는 주님이다. 때가 되면 내가 이 일을 서둘러 이루리라.

 

다시는 태양이 빛이 되지 않고 달이 빛이 되지 않는 그런 세상, 다른 말로 인간들이 의지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첫 창조 의 모형들이 싹 사라지고, 원형이, 실체가 서게 되는 진짜 빛의 세계를 완성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 나라에 집어넣으시기 위해 성자 예수를 빛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들의 육적 기대와 욕망과 의지를 부수시고 진짜 실체를 드러내시기 위 해 빛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에 보면 그 나라가 이렇게 완성이 됩니다.

(묵시21:23)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첫 창조에 속한 모형으로서의 빛의 발광체인 태양이 없어지고 ..빛의 원형이신 하느님의 영광과 어린 양이 등불이 되어 천국을 비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빛에 의해 눈을 뜬 자들은 바로 그 천국의 현실을 보게 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 사람을 살게 하는 진짜 가치는 하느님의 임재에서, 하느님의 얼굴의 비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와 힘은 유한한 것이며 실체가 아닌 유사요 모형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가치에서 자꾸 마음을 놓아가게 되는 것이 진짜 눈을 뜬, 부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형식화시키고 조작해 놓은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 속에서 빠져나와 이 역사와 우주의 실체인, 어두움을 보게 되는 자가 부르심을 입은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의 실체를 직면하게 될 때 안타깝고, 슬프고, 외롭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경에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웃으셨다는 말씀이 단 한 절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지 아세요? 빛이 이 세상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게 되면 구역질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에 속한 이가 어두움에 둘러 싸여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이사야서 52장에 나옵니다.

(이사52:13~14)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예수님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보이셨다는 것입니까? 다른 모든 인생들보다 얼굴이 상하고 쉬 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른이 갓 넘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오십도 안 되었거늘, 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이 서른에 오십이 가까운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과 섞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상함과 탄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빛은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그 자신이 어두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빛은 더욱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사42:18~19) 18 너희 귀먹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 눈먼 자들아, 눈을 뜨고 보아라. 19 눈먼 자가 누구냐? 나의 종이 아니냐! 귀먹은 자가 누구냐? 내가 보내는 사자가 아니냐! 하느님께 봉헌된 이자처럼 눈먼 자 누가 있느냐? 주님의 종처럼 눈먼 자 누가 있느냐?

 

그렇지요? 하느님께서 보내신 빛이 어두움 속의 소경들과 귀머거리들을 건지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건지시는가 하면 자신이 소경이 되고 자신이 귀머거리가 되셔서 그들을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빛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첫째 날에 창조된 빛은, 빛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느님에 의해 부르심을 입고 보내심을 받은 성자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 8:12)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9:5) 5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11:9)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이 빛이시고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낮이 열두 시간) 인간들은 절대 빛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빛 이 어두움에게 짓밟히는 형국으로 구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는 그렇게 약한 자가 되고 어두움 에 물리는 모습으로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는 것을 아는 자가 눈을 뜬 자들인 것입니다.

(고후4:6)6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의 그 빛은 하느님의 명령에 의해 이 세상으로 출격을 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빛에 의해 이 세상 이 창조가 되었고 그 빛 되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빛은 창조를 하는 것이잖아요? 어둠뿐이던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가 빛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비추셨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어두움을 가져가셨다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짓밟혀 어두움 을 빛으로 살려낸 것입니다. 빛의 희생으로 어두움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속성이고 하느님 나라의 존재양식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깜깜한 어둠이 애굽을 덮었던 것 기억하시지요? 그 어두움에 빛이 비추게 되자 어두움이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빠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어떠한 방식으로 비추어졌나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번제단의 제물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단 말입니다. 그게 유월절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불기둥과 구름 기둥도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이 구름에 싸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내가 그 불과 구름 속에 있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불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집어넣으십니다. 그것 또한 새 창조의 모형인 것입니다.

왜 불기둥입니까? 이스라엘이 어두움이니까요.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탄생이 될 때 왜 불의 혀가 등장합니까? 어두움이던 자들에게 빛이 임하여.... 빛으로 끌어내는 사건이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비추시고는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을 해 버리십니다. 그리고는 빛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에페5:8) 8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이게 보내심입니다. 성도는 빛에 의해 어두움에서 나와 다시 어두움에게 먹히는 빛의 삶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러한 성도의 삶을 착한 행실이라고도 하고, 빛의 자녀들다운 삶이라고도 합니다.

(마태5:14-16)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성도는 이렇게 착한 행실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빛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16:27)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그런데 이 행함은, 이 착한 행실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 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각 사람의 행함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바로 그 앞 구절과 붙여서 볼까요?

(마태16:25~27)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께서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행실대로 나중에 반드시 갚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삶으로 보내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자기 목숨을 잃는 삶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의 삶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었지요?

물론 어두움이 다 사라지게 되었을 때 빛의 삶은 그야말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정하신 때까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기간 동안에는 빛이 어두움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당해주고, 작아지는 수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이 세상 속에서의 빛들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두움 속에서 소경으로 살던 사도 바울에게 빛으로 찾아가셔서 그를 부르신 후 그의 삶이 어떻게 끌려 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사도9:15~16)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빛이 소경인 바울에게 찾아가셔서 그를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시는데 그의 삶이 참 빛이신 예수님의 삶처럼 해를 받는 삶이 된다는 것을 천명하고 계십니다. 그게 부르심입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지 않고 성당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를 못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음은 우리 인간의 지혜나 노력으로 이해가 되어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 인간들의 노력과 뜻과 지혜를 완전히 박살을 내어 버리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이 세상의 불가능함과 자신의 더러움에 치를 떨어야 합니다. 그들만이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자신의 부르심과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하면서 무엇을 가지고 변증을 합니까? 자신의 약함을 죽 나열하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그게 내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증거이고 내가 사도라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여러분의 약함을, 그리고 부족함을 나열하면서 그것으로 여러분의 자랑을 삼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전부 자기의 강함이나 업적과 행위를 내 어 놓고 그것을 자랑하기 바쁘지요? 그게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다 이루었다잖아요. 반면에 세상 종교의 복음은 뭡니까? ‘계속 정진하라입니다.

그게 석가모니의 유언이었거든요. 계속 정진하여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신 됨을 입증해 보라 는 것입니다. 그게 고정화, 형식화의 틀 속에 갇혀 있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눈을 뜬 자들은 하느님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의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왜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시지 않으시고 홀로 다 이루셔야 했는지를, 이 역사와 인생 속에서 경험하고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웃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많이 외로울 것이고, 많이 슬플 것이고, 많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소망 속에서, 믿음 안에서 기쁨으로 감지가 되어 질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의 역설인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자들은 유기된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고정화 하고 형식화 한... 가짜 세상에서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사는 자들은 전부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

(데살후1:8-9) 8 그때에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에 휩싸여 오시어, 하느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벌을 주실 것입니다. 9 그들은 주님 앞에서, 그분 권능의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 영원한 파멸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의 복음, 즉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며, 인간과 인간들의 욕망의 전시장인 이 세상의 불가능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형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의 얼굴과 주의 영광, 즉 빛을 떠나 소경으로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말라3:19~20) 19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 두지 않으리라. 20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

 

보세요. 똑같은 불이 내려오는데 그 불에 의해 눈을 뜬 자들은, 다른 말로 예수의 십자가 공로를 이해한 사람은 그 빛이 치료하는 광선이 될 것이지만, 여전히 그 빛을 이용하여 자신의 빛 됨을 입증하려 하는 자들은 그 빛에 의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 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의지 하십시오. 그리고 왜 우리는 그 피만을 의지해야 하는지, 제발 눈을 떠서 여러분 안에 숨어 있는 죄악의 추악함과 이 세상의 실체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자신과 이 세상에게 자꾸 실망하세요.

그게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가 어두움에 짓 밟혀 버림으로 어두움을 구원해 내신 예수의 삶이고 빛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낮은 자리로 밀려 내려 갈 것이고, 약한 자리로 밀려 내려 갈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예수라는 빛만 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게 진짜 빛의 삶인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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