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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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12-29 | 조회수1,563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18년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제1독서 1요한 2,3-11 사랑하는 여러분,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 루카 2,22-35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물고기를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서 노량진 수산시장을 추천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청계천에 가보라고 합니다. 이곳에 가면 없는 것이 없다고 말하네요. 세 번째 사람은 물고기를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물고기는 상상속의 동물이야. 결코 잡을 수가 없어.”라고 말하면서 쓸데없이 물고기 같은 것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마지막 사람은 “당연히 바다로 가면 되지.”라고 말했습니다. 도저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지요. 그 결과 바다로 가라고 했던 사람의 말을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절로 믿음이 생겼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삶 안에서 저절로 주님을 느끼면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의 노력은 전혀 없으면서 그냥 생기는 믿음이란 없습니다. 앞서 물고기를 잡기 위한 많은 정 보를 얻었지만 알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정확한 정보를 따를 수 없었을 테고 그래서 물고기도 잡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는 주님께 대한 많은 정보가 흘러넘칩니다. 그런데 저절로 알고 깨닫기를 바란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주님을 알려는 우리의 노력 없이는 주님을 절대로 느낄 수도 또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뵙는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임을 곧바로 깨달으면서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냥 저절로 알게 된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성령에 이끌렸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하느님 뜻에 맞춰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약간의 노력만으로 모든 노력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고 또 말합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평생을 노력했습니다. 평생의 노력을 통해 시메온 예언자는 하느님의 구원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노력하면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평범하다 여기는 것들 속에서 고결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우리는 기도의 눈이라고 부른다. (웬디 베케트 수녀)
예언자 시메온과 아기 예수님. 시간을 주도적으로 쓰는 사람. 호주에서 있었던 한 실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하루에 한 두 번 차가 지나갈 때 철도의 건널목을 열어 주는 것이 업무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매우 높았습니다. 가장 최고의 직장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석 달 이상 버틴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자신의 주도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주도적으로 쓰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시간을 주도적으로 쓰는 사람은 이 세상 삶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기쁘고 희망차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비록 들어오는 수입이 적더라도 말이지요.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주도적으로 시간을 사용하십니까? 아니면 남들에게 끌려가며 억지로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개도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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