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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정의 수준차이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29 조회수1,987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8년 다해 성가정 대축일



<가정의 수준차이>


 

복음: 루카 2,41-52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우리 가족들도 성가정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 무엇인지는 알고 청해야 할 것입니다. 성가정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모든 구성원이 성당에 다니면 성가정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성당에 나온다고 다 거룩한 사람은 아닙니다. 성가정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족이라고 부르는 공동체보다 훨씬 더 거룩한 가정이어야 합니다. 차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족을 수준별로 구분해보면 성가정의 정의가 더욱 명확해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기나 기생충 같은 것들은 가족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것들도 부모가 분명 존재합니다. 부모와 나, 이것이면 가족형성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태어나서 부모를 찾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피만 있으면 됩니다. 가족은 관계를 배우는 장인데 모기는 가족에게서 배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가족에서 꼭 배워야하는 것은 사랑하는 법입니다. 사랑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행위이고 타인을 받아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모기는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피를 내어주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도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면 모기와 같은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타인에게 아픔만 주며 살아가는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준의 가족은 고등 동물의 가족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 실험에서 아기 원숭이는 태어나서 젖을 주는 차가운 엄마보다 젖이 없어도 따듯한 엄마를 찾습니다. 그 이유는 본능적으로 먹는 것보다 관계를 더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부모가 필요합니다. 무리생활을 하기 위해 모기의 본능에서 탈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본성은 그 줄 줄 아는 본성을 가진 이로부터 배워야합니다. 주는 것이 사랑인데 사랑은 각자 안에서 샘솟는 무엇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먼저 받아야하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먼저 받지 못하면 줄 줄 몰라서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원숭이는 태어날 때부터 무리를 형성하기위해 본능적으로 부모를 찾게 시스템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정도의 수준만 된다고 해도 참 괜찮습니다. 물론 계산적인 자녀들이 태어나서 손해 보지 않는 한에서만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알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사회가 유지됩니다.

 

하지만 인간이 사는 사회라는 곳은 원숭이의 무리와 그 수준차이가 있어서 웬만큼 교육되지 않으면 적응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장이 바로 인간의 가정입니다. 하지만 네가 더 성공해야 한다.” “네가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식으로 교육하면, 원숭이 수준도 아닌 다시 모기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누가 자신만 더 많이 가지려하고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해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적어도 이 수준은 넘어서야합니다.

 

 

디팩 쵸프라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좋은 것을 해줄 수 있을까?’만을 생각해라. 너희가 잘못되면 아빠가 다 책임질게.”라고 교육했습니다. 한 아이는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학교에 자주 빠졌고, 한 아이는 꼴찌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다가 자신은 정작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한 아이는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고 한 아이는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의 부모님들이 적어도 이 수준은 돼야 원숭이 무리를 넘어서는 인격적 사회 구성원을 양성하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부족합니다. 성가정은 이 수준도 넘어섭니다.

성가정은 믿음을 배우는 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자 성전에 남아계십니다. 아버지 집에 머무시는 것이 당연하지만 부모에게 말도 안 한 것은 좀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이나 찾아 헤맨 부모에게 왜 찾았느냐고,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몰랐냐고 묻기도 하십니다. 부모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서로 이해해서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이해를 넘어서야 합니다. 이성적 사고는 믿음을 감소시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부모는 보답 받을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냥 예뻐서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여기서 이성적으로 계산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행동일 수 없습니다. 사회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안 만나는 곳이지만 가족은 하느님이 맺어주셨으니 어떤 구성원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고 돌아와도 아무 일 없었던 듯 받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이 믿음이 믿음을 가진 자녀를 탄생시킵니다.

 

예수님 또한 돌아와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계속하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순종한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인간이 개가 되어 개들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보다 더 이상한 상황입니다. 인간은 개를 만들 수 없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되셔서 인간에게 순종하며 사시는 것입니다. 그냥 그래야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성가정은 성령으로 맺어지는 믿음을 지닌 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믿음으로 사랑하고 이성적 사고를 넘어서는 사랑을 배우는 공동체가 되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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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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