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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1.0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04 조회수1,430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제1독서 1요한 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복음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1950년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쉬가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이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끈들을 준비하고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실험 참가자들은 애쉬가

보여주는 끈이 기준으로 삼은

끈보다 더 길면 ‘길다’,

동일하면 ‘같다’,

더 짧으면 ‘짧다’라고

진술하면 되었습니다.

한 명씩 방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모두 아주 쉽게

 올바른 끈의 길이를

진술했습니다.
두 번째 실험에서 피험자가

다른 일곱 사람과 함께

방 안에 들어갔습니다.

일곱 명은 모두 피험자를

속이기 위한 연기자들이었고,

그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분명히 기준 선보다

더 긴 선에 대해 ‘짧다’며

틀린 답을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들으며

당황스러워하던 피험자들은

자신이 대답할 차례가

 되었을 때 어떻게 말했을까요?
자신의 결정을 내세우지 않고,

집단의 결정을 받아들여서

틀린 답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30%에 달했습니다.
이를 동조심리라고 합니다.

남들이 하니까 자신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답입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거짓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

 꽤 많이 등장합니다.

 죄를 생각해보십시오.

잘못임을 알면서도 남들이

 하니까 자신도 ‘남들도

다 하는데 뭐...’라면서

따라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의 열심 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보면서,

 ‘내가 뭐 특별하다고 나

도 어쩔 수 없어. 그냥 사는 거지.’

라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막습니다.
잘못된 것, 주님으로

멀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동조심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즉, 스스로 주님의 뜻을

리고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런데 이에 따른 그들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지만 이에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는

 엉뚱한 대답을 하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어디에

묵고 계신지를 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직접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당신이 직접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을 따라하는 행동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만을 따라할 수

있도록 주님께 스스로 나아가고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헤르만 헤세)


갑곶성지의 가톨릭 교리서 필사 전시회.

친구의 전화를 받고서...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하나 생각납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입 안은 헐어서 힘들었고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저녁 일찍 씻고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계속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겹쳐서 몸이 피곤하다고

알리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잠자리에 눕자마자

전화가 왔습니다.
오랜 친구의 전화였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내게 털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위로도 해줬습니다.

또 친구의 결정에 대한

 지지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30분 이상을 통화한 후에

친구는 많은 위로가 되었다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상한 증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글쎄 머리가 아프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잔뜩 헐어서 힘들었던

입 안의 통증도 없어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피곤하지도 않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고마워했지만,

오히려 제가 더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몸의 통증이 온 것은

너무 나만 생각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남을 바라보라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특별한 손길은 아니었을까?’
사랑을 실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가장 크게

와 닿는 순간이었습니다.

  2019년 첫 번째로 갑곶성지에 순례오신 단체 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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