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작아지는 만큼이나 커지시는 분 / 주님 공현 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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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9-01-12 | 조회수1,403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영성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직면하는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이냐?’, ‘나냐?’ 하는 물음일 게다. 매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으려는 집착에만 빠진 나 때문에, 우리는 내 안에서 ‘그분’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에 온통 못된 ‘나’만 자리 잡게 한다. 마음 밑바닥에서 예수님과 경쟁을 벌여 내가 이기고자 애쓴다. 이러다보니 믿음의 삶을 산다지만, 어떤 때는 그 도가 너무 지나쳐 결국은 허무한 영적인 패자가 되기 일쑤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이처럼 분명히 밝힌다. 그는 때와 분별력을 갖춘 이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리 때문에 ‘어정쩡한 삶’을 사는지? ‘저긴 내가 가야 할 자리지, 나에게 꼭 어울리는 자리지.’라며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나.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이를 외쳤고, 그곳은 꼭 자신이 머물 자리가 아니라는 걸 믿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실력 있는 이도 머리를 숙일 게다. 물론 실력 있다고 다 숙이는 건 아니리라.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다니는 이들도 더러는 있더이다. 실력과 함께 ‘겸손을 가진 이’만이 자신을 낮출 줄 안다. 그런 이는 어디에 있든 표 난다. 내면이 바깥에 드러나기에. 익은 벼가 숙이는 건 간단하다. 알이 찼기에. 하지만 ‘설익은 벼’는 숙이고 싶어도 못 숙인다. 알이 여물지 않았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학식이 높고 명성이 자자하더라도 숙일 줄 모른다면, 설익은 벼와 하등 다를 바 없으리라.
이렇게 인간적인 면에서는 어쩜 두 분은 경쟁적인 관계일 것이다. 또래이신 데다가 친척이셨고, 두 분 다 제자들을 불러 가르침을 주셨기에. 가끔은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며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훨씬 더 멋진 구도자처럼 보인다. 먹고 마시며 떠도신 예수님보다 그가 많은 이에게 더 큰 존경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진작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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