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그는 이미 세상의 옷, 육신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승리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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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1-12 | 조회수1,753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그는 이미 세상의 옷, 육신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승리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 생각할수록 멋지고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행색을 보아서는 통상적이지 않고, 참 많이 특별했습니다. 낙타 털옷 당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이 입고 다니던 의복은 대체로 단순하고 획일적이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겉옷, 속옷, 허리띠, 두건을 걸치고 다녔습니다.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통옷을 걸친 다음, 허리띠를 맨 후, 두건을 뒤집어 쓰고, 샌들을 신고 그렇게들 다녔습니다. 부자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수입한 아마포나 자색천으로 된 속옷에 양털을 재료로 한 겉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딸랑 낙타 털옷 하나 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낙타털 옷은 당시 예언자들의 복장을 상징하고 있었고, 요즘 낙타털을 재료로 한 코트 가격을 보니 백만원 이백만원을 호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낙타털옷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세례자 요한이 죽어 쓰러져 있던 낙타 한 마리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가죽을 벗겨내고, 적당히 눈 대중으로 재단한후, 얼기설기 엮어, 입고 다녔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했겠습니까? 마치 석기시대 원시인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설교하는 메시지나 풍기는 카리스마를 봐서는, 큰 스승이나 대예언자가 분명한데, 옷 입고 다니는 것을 보니 너무나 이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는 것 뿐만 아니라, 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잘 요리되고 정제된 것 메뚜기와 석청이 아니라, 그냥 대충 드신 것입니다. 의식주 생활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신 미니멀리즘의 삶,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례자 요한에게 의식주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상 것으로부터 이미 초월했던 것입니다. 그가 조잡한 낙타 털옷을 입고 있있던 이유는 이미 세상의 옷, 육신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승리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머리 속은 오로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었습니다. 뒤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정확한 시간에 구세사의 무대 위로 올라가시도록 철저히 준비하는 일, 세상 사람들에게 저분이 메시아라고 정확히 알려드리는 일, 마침내 그분이 커지시도록, 그분이 영광받으시도록, 자신은 작아지고 소멸되는 일, 그것만이 세례자 요한의 존재 이유였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했습니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께로 모두 쏟아부은 세례자 요한의 삶의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그에 비해 아직도 잘 먹는 것, 잘 입고 다니는 것,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을 기대하고 우리들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사목자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양떼를 극진히 사랑하는데 가장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동시에 양떼로부터 진심어린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면, 우리 역시 의식주로부터 과감히 초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로서의 투철한 헌신과 봉사는 자연스레 우리를 극단적 청빈생활로 연결시켜 줄 것입니다. 언제 우리는 우리 양떼로부터, 이웃들로부터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제 삶을 바꿔주셨습니다.” “신부님으로 인해 제 인생이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제 평생의 스승이요 은인이십니다.” “자매님, 존재 자체가 제게 축복이요 선물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복음 3장 30절)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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