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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당나귀의 허세)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12 조회수1,882 추천수1 반대(0) 신고

 



당나귀의 허세

+찬미예수님!

오늘 제의 색깔이 분홍색,

잘 어울립니까?

제대 앞 초에도

분홍색에 불이 붙었죠?

대림절은 원래 보라색으로

아기예수님을 맞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닦는 주간이죠.

하지만 대림 3주는

아기예수님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잠깐 숨을 돌리라는 주간이에요.

이제껏 여러분들이 단식과

극기를 하셨다면

오늘은 잘 드셔도 됩니다.

지금은 전통이 거의 사라졌지만

대림 3주를 장미주일이라고 불렀지요.

어느 오래 된 천주교 마을의

어느 성당에서

당나귀 한 마리를 길렀데요.

이 당나귀는 주로 뭐 할 때 썼냐?

그전에는 대축일 날이면

미사 끝나고 신자들이 행렬을 했어요.

당나귀 등에 예수성심상이나

성모상을 좌대에 모시고

동네를 돌았죠.

그러면 동네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예수성심상을

향하여 고개를 숙였죠.

그런데 문제는 이 당나귀가

착각을 한 거야.

자기가 나서면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니까

! 이거 내가 보통 존재가 아니구나.’

어느 날 당나귀가 대접받겠다고

외양간을 나와 동네를 갔는데

사람들이 머리를 안 숙여.

사람들은 아이고,

성당 나귀가 도망쳐 나왔나봐.’

하면서 잡아서 거칠게 끌려고 했죠.

당나귀가 히잉 거리며

이 놈아, 네 놈이 감히 나한테

손을 대.’ 뒷발질을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 당나귀가 미쳤구나.’ 하며

몽둥이가 막 날아왔지요.

당나귀는 끌려가서

외양간에서 혼자 울었대요.

왜 그럴까?

당나귀한테 인사한 것이 아니죠?

당나귀 등 위에 있는

예수님한테 인사한 거죠.

당나귀는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못 했어요.

우리말로 꼴값을 떨고 있는 것에요.

당나귀가 위대하기에 사람들이

고개 숙인 것이 아니라

당나귀가 모시고 다니는

예수님을 향하여

머리를 숙였던 거죠.

사제들도 예수님 없이

살면 존경 못 받아요.

수도자들도 성모님 없이

살면 존경 못 받아요.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항상 모시고 다닐 때는

이방인들로부터

참 달라. 천주교 신자들은

우리랑 사는 방법이 달라.

이 세상에서도 저렇게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며 존경을 받겠지만

예수님 없이 과연 존경이 가능할까?

교만은 주제파악을 못하는 겁니다.

분수 떠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 세례자 요한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가

정확히 자기 주제파악입니다.

어느 선을 넘어가면

분수를 떤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옵니다.

군중들도 오고,

세리들도 와서 세례 받고,

군인들도 와서

아 이분이 메시아인가 보다

메시아로 떠받듯 분위기였지만,

세례자 요한은 입을 딱 막죠.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두리 뭉실 넘어가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공개적으로 선을 긋습니다.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의 신발 끈도

풀기 어려운 처지라고 합니다.

나한테 기대갖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무시했다면

-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모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기 자신은 앞으로 오실 분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그분의 앞서서 길을 닦는

비천한 존재라는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고백하는

내적인 근거는

자기 앞에 계시는 예수님,

자기가 언젠가는 세례를

베풀어야 될 그 거룩한

예수님과의 엄청난 차이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주제파악을 한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나는 물세례를 주겠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세례를 주실 것이다.’

요한의 물세례는

상징적인 것이었죠.

죄 사함을 받기보다는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상징적인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준비시키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인간을 개조하고

영혼을 개조시키는 거죠.

죄와 벌과 원죄의 사함을

받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령세례는

2000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겁니다.

말씀과 성사와 용서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성령 세례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요한의 물세례는

요르단 강에서 끝이 납니다.

로마서 320절에 율법을

통해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죄를 알려줄 뿐이라 나옵니다.

오늘 미사 오기 전 집에서

반드시 한 번 거울 앞에

서있었을 것입니다.

거울은 얼굴에 뭐가 묻었으면

가르쳐 줄 뿐이지 그 거울이

더러운 것은 직접 닦아줍니까?

율법은 율법 앞에 서면

죄가 무엇인지 깨달아요,

그러나 그 율법 자체가

우리한테 다가와서 우리를

깨끗하게 치유시켜주지는 못하죠.

요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다운 의미의 율법 자체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전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알린다고 하면서

실은 자신을 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죠.

인간이 만든 법이었지만,

세례자 요한이야말로

더럽지 않은 거울이었습니다.

오래되어 군데군데 누렇게 변한

그런 거울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 앞에 서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거울이었지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상징적인 세례였고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기 위한 세례였지,

예수님의 세례처럼 인간을

근본적으로 개종시키고

치유시키는 죄와 벌과

원죄의 사함을 주는

그런 세례가 아니었던 겁니다.

겸손과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 가에 대한 확신은

주제 파악할 때 확실히 생겨납니다.

예수님과 자기 자신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최선을 다한 남자 중의 남자,

상남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자기를 메시아로 알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양이 오신다.

저 분에게로 가거라.’ 하였습니다.

첫째자리에서 둘째 자리로

내려가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첫째 자리로 알고 있는데,

본인 스스로 아니오.’,

제자들에게도 너희들이 바라던

그 메시아가 내가 아니다.

저 분에게 가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12사도들 중에 많은 사도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알려준 대로

그분에게로 갔던 겁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대림절 동안

우리가 묵상할 수 있는 교훈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확실한 모습입니다.

양다리를 걸치지 않고 살은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악한 마음의 회개를

촉구하는 일에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자보다 더 큰 목소리로

포효를 했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이 선이요

악인지를 분명히 알려줬고

본인 자신도 명예욕이나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확실히

자기의 길을 갈 줄 아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모습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들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선의 길과 악의 길이 있을 겁니다.

어둠의 길이 있고

밝은 길이 있을 겁니다.

어떤 때는 선의 길이

환난의 길로 보이고.

악의 길은 평탄하고

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차든지 덥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될 겁니다.

악과의 타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악과 적당히 타협한다고

하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말이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영할 때 마다

이 죄인의 몸 안에 거룩한

주님이 밥으로 오시지만

주님은 제 안에서 커지셔야 되고

제 교만은 갈수록 작아져야 됩니다.’

라고 고백하셔야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장 위대한 점은

공적으로 백성들과 예수님이 만날 수

있도록 준비시킨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냉담 중인 사람과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셔야 됩니다.

사적으로는 자신을 기꺼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악과 연약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낮아지는 모습으로 변할

주변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예수님의 그림자를 보게 될 겁니다.

저 사람을 보면 뭐가 있기는 있어.

어느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변함이 없어. 겸손하고,

아흔 아홉 명이 악의 길로 가도

혼자 당당하게 선의 길로 가.

존경스러운 사람이야.’

세례자 요한과 같이

아기 예수님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세례자 요한의 덕을 청하면서

우리들도 예수님을 준비하는

작은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애씁시다. 아멘

2018년 대림 제3주일(12/16)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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