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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1.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15 조회수1,688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히브 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복음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해외에 나가면 휴대전화를
켜는 순간 문자 메시지 왔다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립니다.
 처음에는 ‘해외에 나왔는데
누구한테 온 메시지이지?’라고
 생각했었지만,
몇 번의 경험이 있은 뒤에는
어디에서 문자 메시지가
오는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외교부에서는
오는 문자 메시지입니다.
 제가 도착한 지역에 대한
주의 메시지와 함께
 위급할 때에는 영사콜센터를
이용하라는 안내를 해줍니다.
언젠가 신부들과 함께
해외에 나갔을 때,
이때도 예외 없이 외교부에서
문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휴대전화 하나로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니까?
이렇게 문자 메시가 오면
감시받는 느낌이야?”
그런데 다른 신부는 조금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 나는 오히려 내가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잖아.”
똑같은 문자 메시지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화가 나는 상황도 될 수 있고,
또 반대로 기분이 좋은 상황도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그렇지 않은가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요?
사랑에서 나오는 긍정의
 마음을 통해서 내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랑의 마음을
 먼저 간직하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내세워 단죄하려는
마음을 앞세울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나쁜 상황이
가득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르 1,24)
사실 베드로도 예수님에 대해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에 대해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꾸짖으십니다.
똑같은 고백인데 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두려움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고 있을까요?
사랑입니까?
아니면 두려움입니까?
긍정적인 마음입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마음입니까?
늘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상황이 바뀔 것입니다.

하루에 세 시간씩 걸으면,
7년 후에는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새뮤얼 존슨)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예수님)
     

마음의 주인

(‘좋은 글’ 중에서)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리고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하였다.

 걸음걸이를 보아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안색을 보아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고,

 말투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았다.
얼마 후에 골짜기를 지나다가

그는 잃었던 도끼를 찾았다.

다음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동작과 태도가 전혀

훔친 사람 같지 않았다.
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때마다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음의 주인은 항상 변한다.
어느 날은 정의가,

어느 날은 탐욕이,

어느 날은 진실이,

어느 날은 거짓이,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 잡는다.

탐욕이나 거짓이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 잡으면

그때는 도적이 된다.
왕양명(王陽明)의 말에,

破山中賊易 破心中賊難

(파산중적이 파심중적난)
‘산속의 도적은 무찌르기 쉬우나,

마음속의 도적을

무찌르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권위있는 말씀을 선포하시는 예수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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