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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1.1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18 조회수1,532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1월 18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히브 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2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4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5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복음 마르 2,1-12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책을 읽다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검색 엔진인

‘구글’에서 검색 1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일까요?

자그마치 18억 2,000만 건

검색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바로 ‘춤’(Dance)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늘 춤을 췄습니다.

옛날 벽화에도 춤추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당시는 지금보다 편하고

편리한 삶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더 힘들고 피곤했을 텐데도

그들은 춤을 췄습니다.
사실 뇌에는 리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춤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아기들을 보십시오.

리듬이 뚜렷할수록 움직임이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난 춤을 못춰요. 난 몸치에요.”

라는 말을 합니다. 본능적으로

춤에 대해 반응하는

몸인데도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바로 불확실성과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내가 춤을 잘 출 수 있을까 라는

불확실성, 그리고 남이 내 춤을

어떻게 평가할까 라는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본성상 하느님과 가까이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확실성과

부끄러움이 들어갑니다.

하느님이 보이지도 않고

또 내게 말하지도 않는데,

이렇게 불확실한 존재에 대해서

믿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라는

부끄러움이지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데도

 분명히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용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이 용기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인상 깊습니다.

많은 군중으로 인해서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주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서

들것을 달아서

내려 보낸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날 수

도록 했습니다.
장애물에 멈춘 것이 아니라,

용기를 가지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용기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이런 용기를

 낼 수 있는 행동도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주셨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많은

장애물이 우리 앞에도 있습니다.

이 장애물을 어떻게 하십니까?

믿음에서 나오는 용기를 통해서

 그 장애물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럭저럭 살지 말고

힘차게 살 것!

(복자 피에르 조르조 프라사티)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


무조건.

석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논문을,

그리고 알찬 논문을 쓰고자 하는

 욕심이 컸었나 봅니다.

그래서 논문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제게 한 선배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은 학사학위

논문을 조금 깊게 쓰는 것이다.

좋은 논문은 끝마쳐야 나올 수가 있어.

너의 논문이 인생 최고의 책이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그냥 무조건 써라.”
이 말을 듣고서

무조건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 신부님과의

계속된 만남 안에서 수정을 하다 보니

석사학위를 받을 수가 있었지요.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꼭 멋지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할까요?

꼭 최고의 모습을 갖추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용기를 내어 무조건 주님앞에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면 충분합니다.

(가파르나움 유적지와 성당)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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