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9년 1월 24일(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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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9-01-24 | 조회수1,06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9년 1월 24일 목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지역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두시켰다.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1602년 교구장이 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에 선종하였다. 말씀의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라고 한다(제1독서)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른다.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7,25―8,6 25 당신을 통하여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화답송◎ 시편 40(39),7-8ㄱㄴ.8ㄷ-9.10.17 (◎ 8ㄴ과 9ㄱ 참조)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당신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구원을 열망하는 이는 언제나 외치게 하소서. “주님은 위대하시다.”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복음환호송◎ 2티모 1,10 참조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복음◎ <더러운 영들은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복음입니다. 3,7-12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큰 무리가 따라왔다.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오늘의묵상◎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께서는 그야말로 온 나라의 슈퍼스타가 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배를 한 척 마련하시고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정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너무 가까워지다 보면 오히려 서로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폭력을 당해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와 함께 설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일으켜 주려고 혼자라도 그 옆에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 일이 있으신 다음 곧바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쳐 주셨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분 앞에 엎드리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만약 병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다 받아들이셨다면, 좋은 사람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마귀들도 받아들일 뻔하였습니다. 기찻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선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공간을 가지고 계셨듯이, 우리 모두도 ‘하느님 외에는’ 내어 주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 공간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부터 시작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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