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해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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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9-01-26 | 조회수1,15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 입니다. 저는 성인 축일에 앞서 다해 연중 제2주간 토요일 독서와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여기 그 제1독서를 올리니 참고로 보세요. 살롬.
다해 연중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2사무 1,1-4.11-12.19.23-27)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길보아 산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한다. 한 사람이 이스라엘 진영에서 빠져 나와 다윗에게 찾아가 그 소식을 전하자, 다윗은 옷을 찢으며 그들을 애도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었지만, 다윗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사울과 요나탄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른다. (2사무
1,1ㄴ-4.11-12.19.23-27)
사무엘 상권 31장과 사무엘 하권 1장에 기록된 사울의 죽음은 두 부분이 조금 다르다. 사무엘 상권 31장에는 사울이 필리스티아인 궁수의 활을 맞고 큰 부상을 입자, 자기 무기병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무기병은 너무 두려워 찌르지 못한다. 그래서 사울은 자기 칼을 세우고 그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1사무 31,3-5참조)
그런데 오늘 사무엘 하권 1장에서는 길보이산의 전투에서 사울이 창을 맞아 겨우 목숨이 붙어 있었는데,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간절한 부탁으로 자신이 죽이고, 머리에 쓴 왕관과 팔에 낀 팔찌를 벗겨 다윗에게 가져왔다고 전한다. (2사무 1,1-10참조)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울고 단식한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는 아말렉인을 자기 부하를 시켜 죽인다. "네가 어쩌자고 겁도 없이 손을 뻗어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살해하였느냐?" (14) "가까이 가서 그를 쳐라." (15) "네 피가 네 머리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네 입이 너를 거슬러 '제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를 죽였습니다.' 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16)
다윗의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다. 사울이 살았으나 죽었으나 임금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사울의 죽음이 다윗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 대한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다윗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노래를 짓고 애도를 한다. 영웅의 업적을 기록하는 '야사르의 책'에 사울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하여 벤야민 지파 사울에 대해 자신의 유다 지파에게도 가르칠 것을 명한다. (2사무 1,17-27)
다윗이 그동안 사울의 집요한 추적에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사울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상이 된 그 순간에도, 다윗은 하느님께 어디로 가야할 지를 여쭙고, 헤브론에 가서 7년 반이나 기다렸다. (2사무 2,1-11)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수만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비방하고 헐뜯고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수십년을 아무 이유없이 대적해 온 사울에 대해, 다윗은 놀랍게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자신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원칙적으로 하느님 앞에 이스라엘 임금으로서의 사울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사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적인 이방인들에게는 기쁜 일이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손실이요 해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런 안목으로 자신의 모든 감정들 위에 바로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인 이스라엘의 손실에 대해 가장 크게 애도하고, 사울에 대해 애도하고 있다.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은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1사무 1.26)
요나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애통해 하는 마음을 슬프디 슬프게 토로하고 있다. 다윗은 감정의 사람이 아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사람이다. 다윗은 성령의 사람이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편에서 보고 판단하고, 원칙을 잡는 신본주의자이다. 우리 자신은 무엇이 원칙인가? 우리는 매사에 하느님보다는, 진실이라는 사실 보다는, 감정으로 사람과 사건을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큰 안목과 가슴으로 보도록 노력하고, 개인적 감정은 개인적 감정일 뿐이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가는 훈련이 참으로 필요한 것 같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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