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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를 읽고 ( 책 한 권을 최대한 나름 압축 요약한 겁니다), 도움이 되시길....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1-29 조회수1,412 추천수1 반대(0) 신고

 

 

 

이냐시오 성인은 16세기에 살았던 성인으로 예수회를 창설했다. 성인의 영성이 4세기가 넘는 세월에도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성인은 온유한 성품과 유연한 태도의 삶을 견지했기에 예수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규칙서인 회헌과 성인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탄력적으로 대처한 영성이 영신수련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성인의 영성은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처음으로 예수회 출신인 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교황님은 가톨릭의 수장으로서 세계인에게 종교의 벽을 넘어 많은 감동을 안겨 주고 계신다. 이 이면에는 예수회의 정신과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간 교황님께서 선출되시고 난 후뿐만 아니라 선출되시기 전 삶과 언행에서도 성인의 영성이 묻어난다. 세상에서는 교황님의 언행과 행보가 파격적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행위를 이끈 밑바탕에는 바로 성인의 유연함에서 나오는 영성이 깔려 있다. 이런 영성을 이해한다면 좀 더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을 것 같다.

 

성인의 영성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주변 상황을 관상하는 자세로 눈여겨보면 그 속에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미지의 공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늘 계신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런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성인의 삶은 자유로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성인은 자유로운 삶을 위해 가난을 추구했다. 나아가서는 영적가난도 마찬가지다. 이런 가난이 자신의 수도 생활을 지켜 주는 하나의 성벽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성인은 청빈한 삶이 예수님의 삶과도 일치가 되는 삶이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의 만남과 그들의 얼굴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영적인 가난은 우리가 어떤 변화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게 교만으로 가는 길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고 한다면 그건 교만의 극치일 것이다. 그러나 이젠 어느 곳에 하느님이 계시는지는 알 것 같다. 이 세상 모든 곳에 계신다. 단지 우리의 영안이 탐욕과 교만으로 얼룩져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하느님 발견이 절대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분명한 사실일 것 같다. 성인의 삶과 영성을 이해한다면 하느님의 형체는 뵐 수 없지만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려고 하는 의지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촉각을 곤두세운다면, 하느님의 숨결을 체험할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외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이다. 단순히 거저 주시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러한 심오한 사랑을 알아야만 하느님을 더 깊게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하느님을 찾는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어느 길도 항상 위험이 따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편안한 길만 찾으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짓인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맞닥뜨려서 극복하는 길밖에 없을 것 같다. 하느님을 찾아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사람이라 불완전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다. 불완전하기에 허물도 드러난다.

 

우리는 이런 허물을 가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바뀔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성인이라고 해서 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길을 걷는 것이 탄탄대로는 아니라고 한다. 성인들의 삶에도 난관은 있었다. 성인들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였는지 지혜를 배워야 하겠고 성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고난은 찾아온다.

 

나 자신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지 말지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이 책을 읽고 성인의 영성을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면서 생각을 조금 달리 하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난 신학자가 아니라서 신학적인 것은 잘 모른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꼭 성경에 나오는 그러한 부인만이 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례 때 하는 약속에는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겠다는 묵시적인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걸 지키지 않는 것도, 예수님과 같이 고통의 십자가인 멍에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 자신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걸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베드로 사도는 무식하고, 어부의 기질인 억센 면도 있었지만 가슴 한 켠에는 여리고 여린 연약한 연민의 정도 많았으리라고 본다. 베드로 사도가 흘린 눈물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이런 베드로 사도의 심성을 잘 활용하셔서 교회의 반석인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셨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각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한 번만 부인했다면 죄책감이 심하게 들지 않았을 텐데 세 번이나 부인 했기에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약속에서 오는 일말의 양심이 더 큰 죄책감으로 다가왔기에 슬피 울며 회개를 하였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한 게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었던 결과를 가져왔다. 한때는 부족한 사람이었고 사탄이라고 예수님으로부터 질책도 받았지만 훗날에는 교회의 반석이 되지 않았던가?

이처럼 지금 나 자신은 한없이 나약하지만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부인했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교회의 반석으로 우뚝 선 모습을 보면서 지금은 부끄러운 신앙이지만 이런 부끄러움이 먼 훗날 나 자신의 성화를 이루는 데 자양분이 되었으면 한다.

성인은 하느님을 만나는 데는 현재의 처지나 현실보다는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장소도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현실 안으로 오시기에 자신의 더럽혀진 영혼이 깨끗해진 후라야 하느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우리의 현재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하느님과 소통하려면 자신과 하느님께 솔직해야 하고 이런 욕망은 하느님 당신의 뜻을 이루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욕망이 솟구칠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살면서 때로 공허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데 불안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공허함도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으로 들어오시려고 만드신 공간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는 간절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견디기가 어렵다고 판단해서 피하려고만 한다. 우리는 그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사실이라고는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

 

하느님을 찾을 때 무의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습의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 곁에 오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평범한 일상 속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왜 그러실까? 실제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 곁에 오시면 우리는 오히려 기쁨보다는 두려울 수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한다. 하느님 체험을 우리는 신비주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서 성인들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지만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현존 체험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꼭 들어야만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러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려면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침묵과 기도 중에 떠오르는 느낌, 영감에서 통찰력이 생기면 하느님 현존 체험을 느끼는, 예민한 영적 감수성이 성장하게 된다. 불가에서는 소리를 듣는 걸 청음이라고 하지 않고 관음이라고 한다. 이처럼 기도로서 관상 중에도 오감으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자신의 신앙 내면의 깊이도 상당히 깊어지게 된다고 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했다. 하느님과의 대화 속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마치 친구와의 우정처럼 돈독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많은 친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대화는 꼭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문자로 주셨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을 보는 것이 곧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이건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예로니모 성인도 일찍이 성경을 모르면 하느님을 모르는 거와 같다고 하셨다.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분주한 마르타보다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마리아를 좋아하신다. 이걸 보면 말씀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성경 말씀 속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영적으로 많은 성장을 할 것이고 하느님의 깊고도 심원한 뜻을 헤아리는 혜안이 생겨 하느님과 영적인 만남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기도로써 자신의 양심을 성찰하면서 하느님께 회개로 자비의 은총을 구하며,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며 그런 감사의 마음을 가슴에 아로새긴다면 더없는 은총으로 은혜를 부어 주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진정한 성찰을 하면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고 또한 누구에게나 낮아지는 겸손의 미학도 배우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성찰을 할 때만이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죄 많은 곳에 은총이 풍성하다고 했는지 모른다. 또한 세심한 성찰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곁에 하느님이 계셨다는 자취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결국 제대로 성찰하고 철저한 자기반성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때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다. 공동체와 함께 공동의 선익을 위해 함께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비단 공동체만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럴 경우 성인은 먼저 모든 걸 선의로 해석하라고 하신다. 사람과의 관계도 우정처럼,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관계를 형성하면 서로에게 축복이 되며 또 서로가 하나가 되어 공유하면 갈등의 장벽도 허물 수 있다. 신앙 공동체에서도 이런 관계가 형성되려면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에서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한다. 또 정원에 비유한다. 정원도 가꾸지 않으면 잡풀이 무성하게 된다. 결국 은총인 신앙도 자신이 잘 가꾸지 않으면 영적인 황무지로 바뀔 수 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 이건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앙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수도 생활에서 말씀에 순명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해 한계를 벗어나는 상황에서도 순명한다는 것이 그냥 억지로 받아들이는 순명이 아니라 그마저도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한 차원 더 높은 의미가 숨어 있다고 한다. 우리 삶도 이런 순명 정신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취제크 신부가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는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게 다 하느님의 섭리라는 걸 알았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렇지 않다면 불가능했다. 그러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 긴 세월 힘든 고통도 이겨낼 수 있었다. 순명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이처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보내신다고 하는 표현이 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꽁꽁 숨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그렇다. 원래 십자가를 진다의 원어적인 의미는 품는 거라고 한다. 그러니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 사랑이 배어 있는 십자가를 질 게 아니라 그 사랑을 한번 품어 본다는 생각을 해 본다면 신앙생활에서 오는 힘든 난관을 극복하는 데도 한결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십자가를 품는다와 진다는 어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길을 가려면 예수님과 같이 고통의 멍에도 같이 져야지 나중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게 된다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고통도 분담하지 않았으면서 마지막에 하느님의 천상잔치에 가게 될 경우 영광만 받으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까지는 부족하지만, 이 책은 하느님을 찾는 영적인 길잡이가 되어 주었고 지식과 머리로만 아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슴과 감성으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는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발전되기를 소원하며, 심기일전해서 지금보다 더 발전된 모습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위대함이 없듯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데도 고통이 따른다. 면을 많이 깎을수록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나듯이 인간의 영혼 역시 하느님과 하나 되기를 지향하면서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의 모난 내면을 깎아낼 때 그 영혼은 칠흑 같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영혼을 더욱더 사랑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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