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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늘을 보는 사람, 땅을 보는 사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3 조회수1,282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람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기 운명의 방향이 결정되어지는 경우를 세상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책을 통해서 보면 허다하게 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로 대화를 하며 주고받을 때 어느 일방 한 당사자가 상대방과 서로 대화를 할 때 만약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허물없이 터놓고 대화를 하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겉으론 순수하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로써는 꾸며내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고 일명 흑심을 가지고 상대방과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상대방이 정말 센스가 있고 영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 대화가 흘러가는 일련의 진행과정에서 상대방이 말하는 진심의 진위여부를 일정 부문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데에 대해 무딘 사람이라면 그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설령 그 사람이 아무리 얼굴에 가면을 쓰고 마치 진실인양 다 꾸며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라도 정말 한 가지는 절대로 가면을 쓸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눈입니다. 눈도 그냥 눈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눈빛입니다. 그래서 범죄심리학에서도 보면 오랜 기간 동안 범죄심리학과 관련된 부분에서 종사한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한다면 아무리 죄를 범한 범죄인이라도 사람의 근본적인 인간이 원래 타고난 그러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근본적인 양심을 자극하는 부분에서는 범죄자의 눈에서도 그 순간만은 범죄자의 눈빛이라고 생각이 안 들 정도의 일반 평범한 사람의 눈빛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저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우리 인간 내부에는 두 가지의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선한 마음 즉 양심과 선한 마음과는 정반대의 욕심 즉 이기적인 마음 이렇게 크게 두 가지의 마음으로 양분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이 두 마음이 항상 병존하며 지내면서 시이소처럼 어디에 무게 중심이 더 가해지느냐에 따라 양심이 더 우세하면 양심적인 생활로 기울어질 수 있게 될 테고 욕심의 마음이 더 많아지면 욕심이 가진 이기적인 생활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금 예를 든 사례처럼 사람은 누구를 불문하고 자기가 태어나면서 자기 주위 환경에 의해 영향과 지배를 받고 자라지만 물론 대단한 사람은 그런 환경조차도 대단한 불굴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고 인간사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평범한 경우를 본다면 누구나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결국은 사람은 자신이 보는 것 또는 자신이 듣는 것에 의해 자신의 생각과 관념이 주변환경으로부터 받은 것에 의해 오랜 세월 받아들여진 정보에 의해 형성되어 나중에는 하나의 자기만의 굳어진 인격체로 변화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일련의 현상을 보고 하나 주목해야 한다면 어디를 주목하면 될까요? 인간은 두 발로 걸으며 하늘과 땅을 두 방향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네 발로 걷는 짐승은 신체 구조상 땅만 보고 걷습니다.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학문적으로는 동물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우리 인간은 그런 네 발로 걷는 짐승과는 분명 다르겠죠. 바로 저희는 하느님의 창작물입니다.


그냥 창작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창작물이라는 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존재는 무언가 그 속에는 하느님의 모상이 들어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어진 존재인데도 그 속에 네 발로 지어진 동물의 본성과 구분되어지는 게 없다면 이건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사는 존재이지만 즉 죽을 수밖에 없는 땅 그 땅의 본질은 흙이겠지요. 원래 사람은 흙에서 창조되어졌으니까요? 지금은 이런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가야 하는 곳에는 지금의 이 육신으로써는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하늘 새땅이 펼쳐지는 그런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살 수 있는 몸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하느님께서는 설령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불러 오고 싶어셔서 하늘나라에 데려가신다고 하시더라도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가 되지 않는다면 결국은 우리가 그곳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없을 겁니다. 결국은 우리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은총도 있어야 되겠지만 부단히 노력해서 원래 원시 에덴동산에서 죄가 없었던 상태의 몸으로 탈바꿈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런 상태의 몸으로 이 지상에서 만들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 천국에 간다한들 힘들 게 분명할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기 전에 천국에 가서 살 수 있는 몸으로 정화되는 곳인 연옥을 거치게 될 겁니다.  연옥이라는 곳은 고통은 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천국을 갈 수는 있다는 희망이 있다고 교회에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분명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나오는 연옥에 관련된 문헌이나 여러 가지 연옥에 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을 봤을 때 그런 연혹도 물론 나중에는 하느님을 뵐 수 있는 천국을 갈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지상에서 사는 게 가장 현명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살면서 최대한 자기의 모든 죄를 보속하고 삶을 마감하는 게 가장 쉽게 보속하는 길이고 또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쉬운 보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썩어질 이 세상을 보고 살 게 아니라 우리가 갈 영원한 도성 새하늘 새땅을 항상 마음에 품고 그 하늘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느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아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두서 없이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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