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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신도가 본 수도자의 삶 2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4 조회수1,230 추천수2 반대(0) 신고

 

 

한때는 사제가 되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만약 그럴 수가 없겠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가고 싶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신학자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아마 지금 제가 봤을 때 그 길이 가장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사항입니다. 그러면 그런 게 불가능하니 평신도 신자 입장에서 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을 때 우리는 영세를 받을 때 평신도도 왕직과 평신도 사제직을 받지 않습니까? 이건 머릿속에는 아는데 이걸 제대로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교리 받으면 보통 말씀하시는 그 내용입니다. 자료를 찾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해도 다 아실 것으로 보고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지금 현재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후에 평신도의 역량에 관한 글과 가톨릭에서 발간된 주요 회람에서 공시된 글을 보면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에서 평신도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 되어야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통계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전 본 자료에서도 먼 미래를 봤을 때 한국도 성소자 감소에 대한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봤습니다. 현재 지금 저희 본당에서만 보더라도 학사님이 한 분 계신데 학교가 통폐합되는 걸 봤습니다.

 

시대적인 분위기가 저출산 시대이고 하다 보니 설상가상으로 정말 성소가 부족한 현실이 눈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게는 되지 않겠지만 극단적인 현상을 전제로 하고 한번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제, 신부님, 수도자, 이런 걸 모두 통칭해서 그냥 성직 수도자라는 개념으로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냥 단순한 예로 성당 천주교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단 성당을 다니면서 천주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일단 예비자 교리를 통해 영세를 받으면 신자로서의 첫단추는 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일반적인 성사 생활이라든지 여타 다른 신심단체에 가입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성당 건물도 있어야 될 것이고 또 무엇보다도 전례를 집전하실 수 있는 신부님이 계셔야 될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로 성당 건물은 있는데 신부님의 수가 극도로 감소해서 인구대비 신자수가 성직자 수에 비해 현저히 많아진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아마도 성직 수도자 수가 감소해서 기존의 성당이 그만 공소로 전락할 그런 위기 현상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인 설정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건 제 추측이 아니라 실제 저희 본당에서 저희 마산교구 신부님이신 황병석 파스칼 신부님께서 한번 강연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지금 저희 본당은 상당히 지역적인 특성상 노령화가 상당히 심각한 본당입니다. 그렇다 보니 사실 세상적인 표현을 하자면 세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젊은 신자가 예비자로 들어와 영세를 받는 현상이 있어야 먼 미래를 봤을 때 성당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텐데 만약 지금의 추세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저희 본당이 어느 일정 시점에서는 공소로 전락한다는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

 

실 실제로 보면 이런 현상을 지금 어떤 분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저는 저희 본당 내부에서 그래도 청년부를 제외하고는 그냥 막내 축에 끼일 정도로 저 입장에서 만약 미래에 저희 본당이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다면 참 난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그래서만이 아니더라도 만약 성직자가 없다면 미사 전례만 보더라도 미사를 봉헌할 수 없다고 한다면 타 본당에 가서 미사 참례를 해야 되는 그런 가상의 상황을 한번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제나 신부님의 존재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수도자가 되는 데에는 제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대략 10년 정도는 소요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일생과 평균 수명에 견주어봤을 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10년이라는 세월을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 어찌 보면 투자한 것입니다. 투자는 투자인데 하느님 나라에 투자를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지금의 체제로써는 독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람은 여러 부류가 있겠지만 성경에서도 나오지만 이미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뭐가 된다는 표현이 있고 원래 나면서부터 뭐가 되고 이런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예전에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날 책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성인이십니다. 요셉 성인이 바로 하늘 나라를 위해 그런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걸 알았을 때 이 성경 말씀을 확실히 무슨 뜻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저는 성직자는 아니지만 이미 창세기에서도 나오듯이 아담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신 것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게 외로워 아담을 외롭지 않게 해 주시려고 또 협력자 역할을 하기 위해 화와를 지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 말이 맞는지 순간 아리쏭하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일단 거의 비슷할 겁니다. 그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여기서는요.


그만큼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혼자서 인생을 독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신학생 때부터 평생 독신을 유지하겠다는 걸 감수하고 사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이미 결혼은 나의 인생에 없는 삶이라고 단념하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걸 절실히 실감하면서 한평생 고독한 길을 가야된다고 생각하며 신부의 길을 갈 겁니다. 물론 여기서 고독이라는 건 단지 남자로서의 고독만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사제의 길을 가다보면 가족의 울타리라는 게 없지 않습니까?


런 의미에서의 고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일련의 사안을 두고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무엇을 보고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을까? 만약 독신으로 일생을 바치게 된다면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그런 부분에 대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지대한 공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런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도 포기하고 하느님께 자신의 한 몸을 투신하는 걸까?


이런 생각도 해봤지만 이런 생각에도 약간의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세상을 어느 정도 살고 신학대학을 들어간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아주 세상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사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교를 가면서 끊임없이 계속 자신과 싸우면서 이게 나의 길인지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계속 자신을 점검하면서 결국 자신이 가는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과 세상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완전한 판단이 설 때, 완전히 그런 확고부동한 생각으로 결심이 되었을 때, 비로서 험난한 사제 육성의 과정을 다 수료해서 드디어 한 분의 새로운 사제가 탄생되는 것일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런 과정을 마치고 사제가 되는데 그 한 개인을 인간적인 면을 봤을 때 어찌 보면 인간 승리라고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숱한 고뇌의 밤도 지세웠을 테고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이 그 한 분 사제의 인생에 서려있겠습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요 성당 건물만 있고 신부님이 안 계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전례를 거행할 수 없고 미사를 봉헌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려고 해도 그런 관계를 신학적으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미사 때 보면 사제의 손이 없다면 하나의 제병은 그냥 제병인 밀떡으로 남을 수 있지만 사제의 손을 거쳐서 축성이 된다면 그땐 예수님의 몸으로 성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걸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영성체도 할 수 없고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최후의 만찬에서 지시한 사항을 지킬 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겁니다. 이처럼 단순한 비근한 예를 들어 사제이신 신부님의 존재와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드린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든다면 만약 사제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하늘의 열쇠를 맡기시면서 베드로 사도의 후계로 이어진 오늘날 사제에게 부여한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해주시는 권한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 약속하신 말씀 말입니다.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말씀 말입니다. 이처럼 이런 걸 사제를 통해서 할 수 있게 해 주셨기에 우리는 성사생활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직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누구나가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공감하면서도 단지 다음과 같은 사안에서 약간 딴지를 걸 겁니다.


사제인 신부님들의 부족한 면을 보았을 때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제는 신이 아닙니다. 단지 신품성사로써 사제의 직분이 부여된 것이고 전례를 집전할 때 그때 사제의 권한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만 사제를 사제로서 대한다는 그런 뜻은 아니겠죠. 어디 세상에서도 대통령도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할 때만 국가 최고 통수권자대우를 하는 게 아니죠.


그 직무와 관련해서 연속선상에서 대통령을 대우하고 받아들이듯이 저희도 전례 밖의 상황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적용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더라도 사제 한분의 성직자가 얼마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와 하느님, 예수님을 이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물론 사제는 어디까지나 성사를 집행하는 권한을 수행하는 일에서만우리가 성직자를 우러러봐야지 그 외에 있어서는 사제인 신부님들도 기본적으로는 예수님께서도 성모님을 통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신성과 인성 두 가지를 가지고 계셨듯이 사제인 신부님도 이와 마찬가지로써 성사를 집행할 때만이 신적인 영역에 속할 것이고 그외에는 일반적인 하나의 사람에 불과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인간적인 면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겠지요.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으시니까 때론 사제인 신부님이시기 이전에는 저희와 같은 똑같은 인간적인 나약함도 지니시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럴 때일수록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홀로 외로이 하느님의 길을 걷는 고독한 사제인 신부님을 위해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를 해드리는 게 가장 합당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서 이젠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냥 체계적으로 정리를 한 게 아니고 나름 타이핑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나가는 방식으로 제가 예전에 평상시에 생각했던 수도자에 대한 단상을 두서 없이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래도 두서는 없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정도는 그래도 사제인 신부님을 어떤 시각으로 인식하고 바라봐야 할지를 한번 고민하는 정도의 묵상을 하실 여지를 드리는 기회가 된다면 저로서는 아주 감사한 일일 겁니다. 두서 없는 글 보신다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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