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2.0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4 조회수1,322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히브 11,32-40

형제 여러분,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 마르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어떤 형제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니까 얼마나 행복하세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며 살고 있을까요?

세상 그 누구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살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지요.

사람은 다른 동물처럼 빠른 발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하늘을 나는 날개도 없습니다.

또한 강력한 치아도 없으며

힘도 그렇게 세지 않습니다.

이렇게 약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만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

싶은 일을 향해 정진하면 되고,

 하고 싶은 일이 없으면

그저 순리대로 닥쳐오는 상황을

 해결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불평불만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인생임을

기억하면서 힘차게 살아간다면

 분명히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인생이

내 안에서 살아지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변할 수 있습니다. 쿠

바의 ‘체게바라’는 의사였지만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이들이 처음의 삶과

 다른 삶을 살도록 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변화를 통해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삶 역시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변화는 가치를 찾을 때

이루어집니다.

가치가 없다고 하는데

굳이 고통과 시련을

 맞이할 필요가 있을까요?

 가치가 없는데 이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가치를 발견하면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던 더러운 영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스스로를 수가 많기 때문에

‘군대’라고 이야기하지요.

마귀들의 군대 전체가

한 사람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더러운 영이 들린 이를

 사람들은 모두 포기했었지요.

 족쇄와 쇠사슬도 풀 정도로

막강한 힘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엄두가 나지 않아 피하는

마귀들의 군대 전체에 맞서시고

그 비참한 인간을

건강하게 해주십니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귀들이 떼거지로 밀려와도

모두 물리치시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 향할 의지를 먼저 갖추고

주님께 매달리기 위해 작은 행동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변화를 가져오면서 모두와 함께

살아지게 합니다.

사람은 두 개의 이름을 갖는다.

하나는 태어나면서 얻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자 미상)

(마귀를 쫓으시는 예수님)


미소.

인류는 친밀함의 감정을

 얼굴에 나타냅니다.

이것이 바로 ‘미소’입니다.

입술 양 끝을 조금 올리고

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지구상에 수백만 종의

생물이 있지만

유일하게 미소를 짓는

생물은 인간뿐입니다.

적의가 없다는 신호인

미소는 문화와 민족과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습니다.
왜 이런 미소를

유일하게 갖게 되었을까요?

사실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너무나도 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능을 통해 어떤 동물보다도

최고 상위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원시시대에는 도망치며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미소’였던 것이지요.

적의가 없다는 것을 표시해서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유일한 ‘미소’를

더욱 더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 담겨 있는

미소를 많이 지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힘들다면 연습을

통해서라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미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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