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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천국을 침노한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5 조회수1,377 추천수1 반대(0) 신고

 

 

칼 라너 신부님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이 있다. 사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수도원 신부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신부님께 질문을 드렸다. 신부님, 지금까지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많이 드렸는데 아버지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영혼도 걱정이 됩니다 하고 말씀드리면서 혹시라도 제가 이 세상에서 비록 하느님을 믿지 않으셨지만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에 대해 여쭤보다가 칼 라너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중앙일보에 이런 내용을 주제로 하는 내용의 글로 신문에 기사가 하나 나왔습니다. 정양모 신부님인 걸로 기억합니다 이건 번역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도 있을 겁니다. 일단 글자 액면 그대로라면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이겠지요. 칼 라너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글을 저 같은 미천한 사람이 21세기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이신 분의 이론을 거론한다는 건 참으로 불경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분이 말씀하시는 건 정말 차원이 높은 차원을 이야기하시지만 저는 그분의 그 차원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제가 이해한 부분까지만 한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분이 이 책에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런 것일 겁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예전에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 천주교 입장은 천주교에서만 구원이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하던데요 이건 확실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주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다시 재정립되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몇 년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살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살았다 하더라도 구원의 문은 그러한 사람에게도 열려있다는 그런 내용으로 하는 말씀을 신문지상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교황님의 말씀이 칼 라너 신부님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다시 쉽게 일반화시켜서 말씀하신 게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 제목을 다르게 번역한다면 이렇게도 한번 번역하고 싶습니다.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순교자를 부를 때 이름 없이 순교한 순교자를 무명 순교자라고 합니다. 이때 무명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느님이 아니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되었을 때 나중에 하느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저는 하느님께서 정말 이런 이름 없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순교한 그분들의 넋을 더 하늘의 역사에서 더 높은 가치를 인정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을 한번 생각해볼까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오히려 만약에 하느님을 믿는 사람보다도 더 하느님께서 이 세상 인류에게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계명과도 같은 복음정신으로 산다고 가정했을 때 나중에 심판 때 단지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만 구원의 길에서 제외된다는 것과 또 아무리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외형만 무늬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실제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생활로 한생애를 살았다고 만약 가정한다면 이 두 양자를 놓고 봤을 때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다가 더 무게 중심을 두실지를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봤습니다.

 

인간이 어찌 하느님의 심중을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한번 인간의 짧은 생각으로 하느님의 의중이 어떨지를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아마도 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와 또 포도밭 비유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묶어서 한번 묵상해봤습니다. 포도밭 비유에서는 보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하느님께서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하느님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주시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심판 때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심판의 기준과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심판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를 보면 더더욱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계명을 하나로 표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인데 두 가지를 단 하나로 표현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애덕을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에서도 예수님께서 바로 이웃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더 알려주십니다. 이런 일련의 사안에서 놓고 봤을 때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서 있기 때문에 안전지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방심할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어떤 누구도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신의 학문을 연구하는 신학자분들께서도 신학적인 해석만 내놓을 뿐이지 그것도 어디까지나 학문적인 해석의 문제입니다. 복음은 개신교 성경과 천주교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합니다만 약간 특이한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제가 개신교에 있었을 때 개신교 성경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는 표현입니다.

 

이 부분을 제가 개종 후에 한번 서로 비교를 해봤는데 이건 개신교와 천주교 양쪽에서 번역상의 문제였습니다. 그건 별도로 한다고 하더라도 저는 이 표현을 봤을 때 예전에 정말 하나의 도전적인 표현으로 이해를 잘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 개신교성경의 이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바로는 천국은 그냥 쉽게 가는 곳이 아니고 정말 기를 쓰고 침범해서라도 가야만 하는 곳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복음에서도 약싹바른 종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해를 조금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정말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는 이런 비유를 통해서 단지 어렴풋이나마 짐작만 할 수 있고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런 사실로 유추해봤을 때 우리는 지금 성당에서 하느님을 믿고 또 하느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마지막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지금 자신이 하느님을 믿고 있고 따라간다지만 실제로 명목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실제로 세상을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복음정신으로 무장되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지 않겠습니까? 결국에는 그런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죠. 어쩌먼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위에는 나중에 그런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우리보다 더 먼저 천국을 침노해서 천국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정말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는 또 무조건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만을 믿고 생활하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큰코 다칠 수도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신앙생활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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