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2.0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6 조회수1,259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9년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히브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복음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어느 조그마한 옷가게에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옷들을 보다가 사장에게

 “이 옷 얼마에요?”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이 사장은 동업자로 보이는

 사람을 향해서 “이 옷 얼마냐?”라고

큰 소리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동업자는 옷을 보더니 “44,000원.”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장은 잘 못 들었는지

 “얼마라고?”라고 다시 묻는 것입니다.

더 큰 목소리로 “44,000원!”

이라고 말했지요. 사장님은 손님에게

 “22,000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지면 대부분

얼른 22,000원을 내고 옷을

사간다고 합니다. 사실 이 옷의

판매 가격은 20,000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동업자가 부른 액수보다

절반 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큰 이익을 보았다면서

다른 판단을 하지 않고

물건을 산다는 것이지요.
이를 대비효과라고 합니다.

그런 상술을 종종 봅니다.

 ‘50만 원’이라고 가격이

붙어 있으면 매우 비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표에 100만원이라고

 붙여 놓고는 ‘50%’ 할인이라고

붙여 놓으면 사람들은 싸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잘못된 기준과 대비해서

큰 이익을 보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오류에 빠지게 합니다.
어떤 기준에 맞춰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기준을 따르고 있나요?

눈에 보이는 이득에만 집중하는 삶,

 내 자신의 편함만을 추구하는 삶,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나의 기준은 아닐까요?

이러한 기준들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내려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십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봐온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저런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들 역시 과거의 모습이라는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그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몇몇의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 외에는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믿음 없는 곳에서는 기적이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기준이 얼마나

많은 잘못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혜 받을 사람의 축복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사람의 앞길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하시려는

주님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잘못된 기준을

따르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에는 자신이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유일하고

 진실한 기준은 주님뿐입니다.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주님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친구는

나에 대해 뒷담화를 하지 않고

앞담화를 한다.

(혜민)

(나가사키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주님의 팬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

소위 아이돌 그룹이

우리나라에 등장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텔레비전을 볼 수 없고

또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방학 때 중고등학생들이 “오빠”하며

쫓아다니는 모습을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옷도 따라 입고,

 말투까지 흉내 내면서 닮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이상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한 번은 동료 신학생들과 방학 때

이 모습에 대해서

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아이들이 정말로 미쳤나봐.”

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한 신학생 친구가 이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미쳤다.”
서로들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님이 좋다고

 이 길에 들어섰잖아.

주님이 좋다고 그분께서

 좋아하는 것만 하려는 것이잖아.

그렇다면 스타를 쫓아다니는

아이들과 뭐가 다른 거야?

그 아이들도 너무 좋으니까,

사랑하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잖아.

주님 좋다고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우리가 더 심한 것 아니야?”
이 말에 모두가 “맞다.

우리 모두 미쳤다.”라고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팬이라고 말하면 스타의

모든 모습을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스타가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행하려고 하겠지요.

우리는 주님의 팬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얼마나

닮으려고 하고 있을까요?

또한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을

얼마만큼 실천하고 있을까요?

팬이 아니라 방관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합동위령미사 때에 봉헌된 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