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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가난이 우리 교회를 구원할 것입니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7 조회수1,230 추천수5 반대(0) 신고

 



가난이 우리 교회를 구원할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뜻밖의 선물처럼,

마치 혜성처럼 우리 앞에 등장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생각할수록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신 후

성하! 교황명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에

그분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프란치스코!” 라고 외치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분이

예수회 회원 출신이셨기에,

당연히 예수회 회원이셨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성인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랑과 온유의

박사이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인가 생각했지만,

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분은 단 한 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명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로

결정하심을 통해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신 것입니다.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상업주의,

비인간화와 세속화로부터

세상과 교회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분은 아시시 프란치스코에 이어

800년만에 2의 청빈 운동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그토록 청빈에 대해 크게 방점을

찍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난이 우리 교회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빈한 삶, 검소한 삶이

우리를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물론 우리 교회마저

물질만능주의의 깊은 늪속으로

빠져 들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을 자리가 없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상처 투성이의

몸으로 위로와 치료를 받으러

교회에 왔다가 더 큰 상처를 입고

울면서 떠나갑니다.

교회는 기득권의 수호와 영역의

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복음 선포,

영혼의 구원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열두 제자들을 사목 실습 현장으로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도

강한 어조로 청빈한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마르코 복음 8~9)

예수님의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당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사목자들이

좀 더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

신앙의 본질과 핵심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에

몰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행하는

제반 사목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의

결핍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목자로

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이 요구됩니다.

거듭되는 사목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사목적

회개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도회 입회 전,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부족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일종의 천국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별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자연스레 교리교사로서의 사명에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입회후에도 비슷한

체험이 계속되었습니다.

상처입은 아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틈만 나면 티격태격했지만,

그 와중에 아이들로부터

혈육 이상의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맛본 이후 사목자로서의

대대적인 회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좋아하니 그걸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힘들지만 아이들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돈이며, 좋은 차며,

메이커 옷도 다 필요 없었습니다.

어디 외출 나가도 머릿속은

늘 아이들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의 행복,

아이들의 구원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위한

투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청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왜 우리가 부차적인 것들,

외적인 것들,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그리도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사목적 회개가 이루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사목 대상자들,

양떼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나를 너무 사랑하고

존경해서 틈만 나면 나를 찾고,

내 소매를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 사랑 체험을 한 이후

어찌 그들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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