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8 조회수2,472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다해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복음: 마르코 6,14-29




내림

LORENZETTI, Pietro 작, (1325)
  

 

 

 

 

 

카인은 언제 죄를 지었을까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칠 때일까요, 아니면 아벨을 살해한 순간일까요? 성경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기 이전에 이미 하느님께 화가 나 있었다고 전합니다. 아벨의 제물만 기꺼이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화를 내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제물을 바치기 이전부터 그는 죄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주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 일은 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농사짓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고, 농사를 짓는 일은 자신의 소유를 늘리는 일입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에 했던 것이고, 땅을 일구는 일은 죄를 지은 다음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벨은 죄를 짓기 이전의 아담의 상태를 나타내고, 카인은 죄를 지은 이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아벨은 동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카인은 곡식을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동물의 수준으로 사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하느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지위를 일깨워주는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동물처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동물의 밥통인 말구유 위에 놓이신 것과 같습니다. 동물로 태어나든 인간으로 태어나든 그것을 본성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동물적 본성을 귀한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이 아담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원죄를 지으면 자신만 알아 농사를 지어 소유하는 데에만 정신을 쏟게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직업에서 이미 원죄를 지은 사람인지, 아닌지가 드러납니다. 카인은 원죄를 지닌 일을 하기에 어떤 제물을 바쳐도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실 수 없고, 아벨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에 어떤 제물을 바쳐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카인은 처음부터 죄인이었고 다만 그 죄가 시간이 흐르면서 커진 것뿐입니다. 인간은 행위로 죄를 짓기 이전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원죄를 설명하며 인간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닙니다. 본성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든 본성대로 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죄를 지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이 죄의 굴레를 끊어주지 않으면 인간은 그 죄의 속박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카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헤로데에게 목이 잘리는 요한은 아벨과 같은 사람입니다. 헤로데는 나름 요한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요한을 죽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기 싫어도 이미 죄를 지을 수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이미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더 큰 죄를 짓지 않으려면 그 죄책감에서 탈출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왕이기에 요한을 죽이고, 죽이지 않고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면 죄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물은 아래로 흐르듯 죄인은 반드시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 생기는데 이것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원죄를 지닌 인간은 성장하며 죄책감을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심이라는 법으로 자아에 의해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이 죄책감을 이용해 사람을 자기 종으로 만듭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죄책감을 없애려면 이런저런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며 세상 것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남을 판단하며 자신을 합리화한다던지, 남에게 인정받으며 양심의 가책을 무마시키려 합니다. 혹은 죄책감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세상의 돈과 명예로 보상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집착들이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헤로데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시 유일한 예언자인 요한의 목까지 치게 된 것입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자신 안에서 반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죄책감을 없애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죗값을 치러주셨음을 우리가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더 이상 자기합리화를 위한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나의 죄가 사해졌음을 믿을 수 있는 증거는 내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계속 죄를 짓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의 죄를 없앤 것이 아닙니다. 만약 부모가 담배를 많이 피우는 자녀를 위해 폐를 하나 기증했다고 가정해봅니다. 죽어야 할 자신을 위해 부모가 폐를 하나 떼어 주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계속 그렇게 많이 피우면 그 사람은 부모가 자신을 위해 폐를 기증했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아니면 인간의 수준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성사는 반드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사람이라면, 그리고 믿기만 한다면 내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 때문에 또 죄를 짓는 일은 없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또 죄를 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반복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변하지도 못하고 그러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헤로데에게 요한은 작은 죄에서 멈출 수 있도록 충고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충분히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요한의 목까지 친 헤로데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죄의 속박은 세상의 속박과 같습니다.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참 자유이고 참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고 더 깊어지기 전에 죄의 굴레에서 빨리 벗어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 덕분으로 천사처럼 깨끗해졌음을 믿읍시다. 이 믿음만이 더 이상 죄의 굴레에 갇혀있지 않게 만듭니다.

 

 

 

 

 

    

 

          

     

  

 

책 구입 문의 하시는 분이 많으셔서 알려드립니다.^^

하상출판사(Tel 031-243-1880)로 전화주문 하시거나, 

바오로딸에서 주문 가능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