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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딱 한 번의 삶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할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8 조회수1,230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 저는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해들었습니다. 제가 개신교에 있었을 때 개신교 프로그램 중에 선교목적으로 미션아카데미라는 걸 했습니다. 그걸 통해서 지역사회에 선교를 도모할 목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그때 거기서 인연을 맺어 제가 가르친 학생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초등학교때부터 머리가 아주 우수한 아이였습니다. 정말 비상한 머리를 가졌습니다.

 

그 애를 지도하면 정말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아무튼 지도하는 사람 역시 지루하지도 않고 지도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데 그걸 잘 받아 먹지 못하는 걸 보면 정말 답답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오늘 이 애 형이 저에게 잠시 한 달 동안 배워야 할 과정이 있어서 오늘 만났습니다. 사실 이 애 동생은 저는 내년에 대학을 진학하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이미 과학 고등학교에서 조기 졸업해서 포항공대를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진심으로 기뻐 축하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어머니께도 전화로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근데 그 학생의 어머니는 의외의 반응을 하셨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약간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나중에서야 이 애 형을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는 이 애가 대전에 카이스트를 진학하기를 원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전화로 그 어머니께 희망적인 말을 전했습니다. 사실 제 누나 집에 조카가 고려대 전파공학과를 나와서 카이스트에서 박사과정을 받고 지금은 우리나라 대기업 본사 연구실에 있습니다. 이 조카를 예를 들어 그 학부형에게 적절한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저도 저와 다른 길을 가는 조카라서 그 세계를 잘 모릅니다만 그냥 제가 들은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을 토대로 전해드렸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네임밸류가 있는 대학을 나오면 그 네임밸류가 평생 동안 하나의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조카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을 전해드렸던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서 자기가 그 분야에서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개척하지 못하면 자기 출신 대학의 이름이 자신의 인생의 성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것을 학부모님께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간 제가 가르쳐서 우수한 대학을 나와 사회에 진출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애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런 내용으로 말씀을 전해드리니 그제서야 학부모님은 조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보고서 하나 느낀 점이 있습니다.

 

학부모 입장에서 자기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그때 느끼는 상실감 이런 것도 제가 말하기 전에 느꼈던 거랑 수치로 만약 표현한다면 동일한 수치의 상실감이었을 겁니다. 근데 제가 그 학부모님께서 모르시는 사실의 팩트인 정보를 드렸을 때 그분이 그때 느낀 상실감의 수치는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들은 수치일 것입니다.

 

저는 이걸 이렇게 생각합니다. 실제 상황은 제가 그분께 말씀을 드리기 전이나 후나 변경된 상황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처해진 상황을 놓고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처해진 상황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상황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고정된 시각에서 사로잡혀 있다면 그 생각에 마치 포로가 되어 있듯이 전혀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항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건 결국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이 처해진 상황을 놓고 좋은 상황으로 상황을 설정하는 것도 자신의 현재 불만족스런 환경도 극복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차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고정관념에 매여 사는 사람은 정말 자신은 그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저도 해당되고 누구나 예외 없이 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정된 시각에서 탈피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역시사지입니다. 옛날에 가수 김건모의 노래 중에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이런 노래 있잖습니까?

 

바로 타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하면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에서는 고정관념이 잘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건 제 이론이 아니고 저명한 사회학자의 이론입니다. 사회 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제일 먼저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본능적으로 자신이 먼저 생존의 위험이 없는 상태에서만이 자신의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심리가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은 자기가 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것이겠죠. 물론 저도 거기엔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그건 세상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신앙적인 관점에서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로만 형제자매라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도 쉽게 형제자매라는 말을 쓰게 됩니다. 근데 그 말을 우리는 너무나도 부도수표 남발하듯이 남발한다는 사실입니다. 형제자매라는 건 우리가 세상에서 언제 사용하는지요? 바로 같은 부모님의 피를 나누었을 때 우리는 형제자매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로 맺어진 즉 영적으로 피를 나눈 형제자매입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를 영합니다. 미사 때 말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나눈다는 건 예수님의 피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 같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정말 살아 있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형제자매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게 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제자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육적인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실제로는 이렇게 인식하지 않고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라는 식으로 그냥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기가 다반사입니다.

 

정말 이건 말처럼 쉽지 않지만 만약 평생을 이런 모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봤을 때 우리의 삶이 그냥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이 그저 하루하루 변화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면 십년을 사나 이십년을 사나 자기가 살은 삶의 햇수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 본다면 정말 어쩌면 듯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차피 한 번 태어난 인생인데 그러고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인데 하느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인데 이런 귀중한 영혼의 가치를 지닌 존재가 그냥 아무런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한 세상 살아간다면 그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영혼도 어쩌면 불행한 영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도 역시 포함해서 말입니다.

 

저는 오늘 한 학부모님과의 일어난 일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의 환경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걸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해석하고 고정된 시야에서 벗어난다면 자신의 마음 상태도 편안한 상태를 가질 수 있을 테고 그런 고정된 시야에서 벗어나려면 항상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서서 한번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이걸 우리 신앙 공동체에서 맺어지는 교우 간에 인간관계인 신앙으로 맺어진 형제자매라는 관계에도 한번 이런 걸 적용해서 생각한다면 나와 너는 다르고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말로만 미사 때 항상 평화의 인사를 빌 때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지만 이는 한낱 새빨간 거짓말을 매일 하느님께 하는 거나 진배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제가 경험한 삶이 저에게는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확장되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여지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묵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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