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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5주일/나를 따라 오너라/신 대원 신부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09 조회수1,466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복음. 5,1-11

나를 따라 오너라


 한 수도자가 있었다. 깊은 산 속 바위가 그의 집이었다. 비바람과 굶주림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명상의 기쁨 속에 살았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수도에 필요한 책 한 권을 줬다. 다음 날 아침 책을 보니 쥐가 표지를 갉아 먹었다. 쥐를 쫓고자 고양이를 구했고 고양이에게 우유를 주려고 소를 마련했다. 그것들을 혼자 돌보기 힘들어 여인을 맞아 들였고 그를 위해 집을 지었다. 귀여운 자녀도 생겼다. 더 이상 명상에 전념할 수 없었다. 책 한 권의 소유로 수도자의 삶은 달라졌다.

 우주생성 수백억 년에 비하면 우리가 머물다 가는 인생 80여 년이란 순간처럼 짧은 세월이다. 그마저 대부분 슬픔과 고통으로 쌓여 있다.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겪는 고통은 불완전한 인간 속성상 자초하거나 가족, 사회공동체의 생활을 인연으로 숙명처럼 씌워지는 짐이다. 또는 우리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예화의 수도자처럼 더 많이 소유함으로써 오히려 본질적인 것에서 이탈되는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 치열한 경쟁구도 안에서 겪어야 할 허무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부와 지식과 세상을 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똑똑한 사람을 보면 불평불만을 품고 불행을 느껴 평화롭지 못하다.

 우리는 부서지고 깨어진 인간이요 영적 육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고통스러운 존재다.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희생제물인 어린양이 되셨다. 봉헌된 희생양의 삶을 사시면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몸소 겪으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에게로 결집시키셨다.

 욥은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을 거들떠본 적이 없는 의인이다.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 7,1-7)이라며 고통을 토로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런 욥에게 고통을 허락하신다.

 욥의 고통은 예수님 십자가를 상징하는 의인의 고통으로서 대속의 의미를 뜻한다. 새로운 생명을 낳는 희생제물이며,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이고 구원의 신비로 연결된다. 죄인의 희생과 고통은 의로우신 하느님 구원계획에 대속물이 될 수 없다. 의인의 고통만이 원죄의 멍에에서 인류를 구할 봉헌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상생활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아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다. 즉 스스로 고통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을 아시므로 그 고통을 껴안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희생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신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21).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통과 기쁨, 패배와 승리, 죽음과 삶이 표리관계에 있다는 완벽한 상징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예수님 십자가 고통과 함께 또 다른 생명을 낳는다. 그러기에 참고 견디어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 우리 존재자체를 뒤 흔드는 이 고통을 봉헌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좌절, 우울증과 자살 등에 이르는 심각한 인격적 파탄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될 것이 아니며 반드시 하느님께 드리고 그 결과까지도 완전히 의탁해야 할 봉헌물이다. 고통을 봉헌한다는 것은 우리의 온 인격을 드리는 것이다. 새 생명을 낳음으로 물질적 풍요를 돕는 경제적 봉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여기에 고통의 진정한 의미가 구원의 신비 안에 숨겨져 있다. 고통의 봉헌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더 큰 기쁨을 잉태한 거룩한 대속물이며 사랑이다.

 우리는 살면서 남에게 준 고통에 대해서는 회개와 보속으로 하느님과 일치해야 한다. 주어진 고통을 기도와 함께 하느님께 드리며 서로가 위로하고 도움으로써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눈물이 마르고 설사 뼈가 나와 보일 만큼 운다 해도 결국 세상은 무정한 것 그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며 이웃의 외면을 더 고통스러워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영적, 내적 치유를 해주셨다. 우리도 이웃의 고통과 함께해야 하며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

[말씀자료 : - 신대원 신부 - [편집 : 원근식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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