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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2.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10 조회수1,406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2월 10일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이사 6,1-2ㄱ.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제2독서 1코린 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

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 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어떤 교우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천주교 신자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저는 이 사람과 전생에

원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 사람과는 좋은 관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관계를 절대로 맺을 수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런 예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아주 친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분이 급하게

 돈 쓸 일이 있다면서

돈 좀 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워낙 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좋은 마음을 가지고서

흔쾌히 빌려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한 번 더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이때는 어떨까요?

 그래도 친한 관계이기에

약간 미심쩍지만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또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때부터는

나쁜 관계가 되고 맙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나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려울 때,

뜻밖에 이 사람이 나를 도와줍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분명히 꿍꿍이속이

 있을 것이라면서 의심하고

가까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또 다시 어려움에서 나를 도와줍니다.

그러다가 더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일처럼 도와줍니다.

이때 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나쁜 관계가 아닌

가장 좋은 관계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좋은 관계도

 나쁜 관계가 될 수 있고,

나쁜 관계도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원래부터 좋은 관계도

또 반대로 나쁜 관계도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뿐만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즉,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은 주님께서

 내게 특별한 사랑을

주시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의 뜻에 따라 살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특별한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은총을 받은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거부했던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늘 사랑으로서

다가오시기 때문에,

이 사랑에 응답만 하면

 좋은 관계를 간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때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큰 행복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으면

그 고통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

(틱낫한 스님)

(베드로 사도)

즐기십시오.

남미 페루 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페루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마지막 여행지로 볼리비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티티카카 호수를 가기 위해

 ‘푸노’라는 도시에서 1박 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여행 현지 가이드가 이 도시에서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갱단도 있고 때로는 총격전도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항상 그 도시를

걸으면서 둘러보았는데,

이날만큼은 밤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위험하다고 가이드가 말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냥 호텔 방 안에만 있었습니다.

혹시 어떻게 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연히 호텔방의 창문으로

밖을 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드의 말 한 마디가 저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 한 마디에 행동의

제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디든 다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는 장소를

조사해보았습니다. 어디였을까요?

비행기나 자동차 안이 아닙니다.

 가장 많이 죽는 장소는

 침대라고 하더군요.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곳이니까

이제는 침대를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로 인해서 즐길 수 있는 것도

즐기지 못한다면 가장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걱정과 불안으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지에 아름다운 조각초를 봉헌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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