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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2.1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16 조회수1,59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2월 16일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창세 3,9-24

9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16 그리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23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24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 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복음 마르 8,1-10

1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2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3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4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7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8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9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10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방으로 가셨다.

 

제가 이곳저곳에서

많은 강의를 하지만,

이를 위해 저 역시

 많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교육을 받으러 갑니다.

교육 중에는 무료 강의도 있지만,

비싼 강의료를 지불해야 하는

 유료 강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료 강의와 유료

강의의 차이를 보면,

듣는 사람의 자세부터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강사가 뛰어나다해도

무료 강의를 보면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꼬아 앉아서 듣기만 합니다.

 마치 ‘어디 얼마나 잘 하나 보자.’

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감시하듯이 바라봅니다.

 그러나 유료 강의는 좀 다릅니다.

똑바른 자세를 취하고 손에

펜을 쥐고서 열심히 필기를 합니다.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재미있지도

 않은데 반응이 대단합니다.
이는 저도 마찬가지더라고요.

꼭 듣고 싶었던 강의가 있었는데

500만원이 넘는 강의료를

내야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서

어떠했을까요?

강사의 말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집중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강의료를 뽑아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말이지요.
사람들은 공짜로 얻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명한 강의들은 다 비쌉니다.

비용을 지불한 만큼 자세도

좋아지기 때문에, 교육성과도

당연히 커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는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기만 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주시는 것도 모두

공짜로 주신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일까요?

님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주님의 뜻을 따름에 있어서

소홀해 합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으로 모두 공짜로 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소홀히 해도 된다고

공짜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로 받았으니, 우리 역시 공짜로

 나누어 주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도 충분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봉헌을 보시는 것입니다.

빵 일곱 개라는 작은 봉헌이었지만

 사천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는 놀라운 은총을 주십니다.
공짜냐 공짜가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이며,

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마음으로 봉헌과 희생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마음만이 주님의 커다란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이고,

그렇게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닐 도널드 월시)

(눈 맞으신 예수님)


구체성이 진정성이다.

책을 읽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책 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하루에 다섯 장이라도 읽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진정성이 있습니까?

약속 시간 전에

만나기로 한 사람에게

 “조금 늦을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듣는 것과

 “10분 늦을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듣는 것 중 어떤 말에

 더 믿음이 갑니까?

 애인이 “나 예뻐?”라고 물을 때,

“응. 예뻐.”라고 대답하는 것과

 “당연히 예쁘지. 눈 크지, 코 오뚝하지,

입술도 얼마나 매력적인데.”라고

대답하는 것 중에서 어떤 말이

더 진정성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진정성이 느껴지고

믿음이 생기는 말은 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도 그런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우리 가족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주님! 열심히 살게요.

”라는 기도 내용에서 과연

 진정성과 믿음이 느껴지십니까?

우리의 진정성이 담긴 믿음은

이러한 구체성도 함께 해야 합니다.
오늘부터라도 우리의 기도 방법을

 조금 바꿔보십시오.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기도를 할 때,

분명히 진정성이 담긴

믿음을 표현하게 됩니다.

더불어서 우리의 기도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을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요?

막연한 기도를 통해서

기도의 응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갑곶성지의 십자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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