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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 내 영혼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16 조회수1,552 추천수3 반대(0) 신고

 

 

예전부터 많은 고민을 한 부분이지만 어제는 사실 제가 평소 고민한 주제에 대해 밤 세워 고민해 본 게 있습니다. 어제는 저희 본당에 꾸리아 회의가 있어서 꾸리아를 참석하고 왔습니다. 제가 꾸리아 서기를 맡은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습니다. 어제 꾸리아를 참석하고 와서 문득 떠오른 단상입니다. 레지오를 오랫동안 하지 않고서 꾸리아 간부를 맡았기 때문에 사실 크게는 아니라도 조금 어려운 현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저는 어제 꾸리아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참으로 회의적이었습니다. 비단 저희 본당만 이런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다른 종교에서도 몸을 담고 있을 때랑 비교를 해 본다면 사실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좀 있습니다. 사랑이 2프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제가 개신교에서 개종을 한 거라서 참 말씀을 드리기가 힘들지만 물론 개신교도 추악한 민낯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말 배울점이 있다면 천주교도 이런 면에서는 벤치마킹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스페인에 계시지만 얼마 있으면 또 로마에 가시지만 예전에 이 부분에 대해 수도원 신부님과 정말 개인적으로 대화를 많이 나누어봤습니다. 신부님께서도 제가 드리는 말씀에 많이 공감하십니다. 자세한 내용은 표현할 수 없지만 제가 이곳에서 일부분만 여러분과 나눔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말 천주교를 사랑합니다. 저의 이런 마음은 저를 거의 2년 동안 지켜본 조금전에 언급해드린 수도원 신부님이 증명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냥 저의 부족한 생각이지만 한번 제 생각을 나누어보겠습니다.

 

 

신앙공동체와 세상공동체 이런 양분법적인 사고를 떠나서 인간이 무리를 이루어 공동체가 형성된 곳에는 서로의 생각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공동체와 다른 특수한 공동체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조금 더 우아하고 고상하게 이야기한다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빛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그런 특수한 성격을 가진 신앙공동체입니다.

 

물론 빛의 자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얼마든지 서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 제각기 다른 의견이 있다면 서로의 생각을 토론과 토의를 거쳐 가장 최적의 공동선을 이루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신앙공동체 뿐만 아니라 세상공동체 어디에도 항상 그 공동체에 평화를 깨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평화를 깬다는 의미는 이런 의미입니다.

 

서로의 반대 의견이 있다고 해서 서로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의견 일치가 힘들어진다는 의미에서 평화가 깨진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평화는 이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견 불일치는 당연히 일치로 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하나의 진통 과정이기 때문에 이건 하나의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근데 제가 우려하는 평화는 이런 게 아니고 무조건부터 그 마음에 서로 어떤 적의를 품고 상대방에 대한 자기의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공동체에 한 개인 감정문제를 공동체 전체 문제로 비화시켜 나가면서 공동체 전체에 평화를 깨는 그런 의미에서 평화를 깨는 사람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말에도 있습니다.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공동체도 하나 하나의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만 우리는 어떤 세상의 이권단체처럼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고 멀리 보면 하느님의 인류구원 사업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의 일부로써 형성된 것입니다. 이런 대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아무런 명분도 없이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시키는 그런 행동은 어쩌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하나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야를 좀 더 넓게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한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을 할 뿐입니다. 인간은 부족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세상적으로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위와 협력해서 서로 도와가며 어려움이 있다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며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예전에 오래된 통계이지만 천주교 신앙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왜 천주교 신앙을 선택했는지 말입니다. 지금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이 통계와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구실이 처음 신앙을 가지는 계기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정 부분 인정하는 사실도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부분이 있었으니깐요. 이런 사실은 어쩌면 신앙생활이 어떤지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일면 타당할 수 있습니다. 근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건 하나의 이상에 지나지 않는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만큼 그렇게 신앙생활이 호락호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마음의 평화가 오기는커녕 오히려 더 근심과 걱정과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없었을지도 모르는 스트레스를 가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제가 스트레스라는 말로 표현을 했지만 신앙적인 측면에선 하나의 자기가 짊어질 십자가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마음의 평화를 가지기 위해서 신앙을 접했다가 나중에는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은 바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 호랑이 소굴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서부터일 겁니다. 결국은 신앙생활이라는 게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하느님을 만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미끼였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서야 오히려 신앙생활을 하는 게 자신의 마음이 더 편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더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거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의미를 다시 재발견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신앙생활하면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가 초보 신앙일 때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신앙에 발을 내디딘 거였다면 유아기 신앙에서 좀 탈피해서 신앙이 성장했다면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도 하나의 자신의 신앙이 우뚝 올라서는 데에 있어서 장애물과 시련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해 주는 디딤돌로써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런 어려움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게 어쩌면 축복이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이런 걸 통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똑같은 신앙공동체 내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거시적인 측면에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부분을 한번 객관적인 시각으로, 영적인 눈으로 한번 들여다본다면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한번 보세요. 제가 한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가 신앙을 가지게 되면 하느님을 잘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지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하려고 마음먹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시작은 좋게 시작했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길을 걷게 되는 겁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아서 먼 여정을 향해 가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또 하나는 처음 출발은 좋았는데 차츰차츰 신앙생활을 하면서 처음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자 하는 여정에서 궤도가 이탈되어 달리는 거라는 겁니다.

 

결국은 자신의 신앙여정에 있어서 궤도가 탈선되어 달리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점은 궤도가 탈선이 되었으면 다시 궤도를 수정해서 원 궤도에 올리면 되는데 그런 탈선된 궤도를 계속해서 달린다는 데 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신앙여정에 궤도가 이탈되었다면 여러 가지 경고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주변 사람들로부터서도 그런 경고의 메시지를 받게 되지만 이런 부류의 신앙인들은 그걸 하나의 자신의 신앙에 경종을 울린다고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의 형태의 모습과 행동을 취하고 그런 경고를 계속 무시하다 보니 나중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해서야 이미 그게 자신에게 주는 경고였다는 걸 알지만 이미 그때는 때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결국은 우리가 달리는 지금의 신앙여정도 마찬가지이지 않겠습니까? 지금 나의 신앙여정의 궤도가 정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가는 여정에 정상적인 궤도를 달리는지 말입니다. 결국은 똑같이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하여도 어떤 사람은 나중에 자기가 도착하는 종착역을 보니 바로 하느님과 성모님,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안전하게 잘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나중에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에는 하느님과 성모님, 예수님은 안 계시고 영적인 허허벌판에 도착하게 된다고 한번 상상을 한다면 유황불이 이글이글 타는 그런 게 지옥이 아니고 이게 바로 지옥이 아니고 뭐가 지옥이겠습니까?

 

하느님과 성모님, 예수님을 뵐 수 없는 그런 곳이 지옥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극과극을 달리는 결과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요? 이런 면을 한번 묵상해본다면 결국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앙공동체에서 자신의 모습이 지금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모습일까를 자신의 양심의 거울로 본다면 자신의 양심이 그 해답을 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 속에도 우리의 모상인 하느님께서 좌정하고 계시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은 신앙생활하면서 자신의 아집을 버리지 못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고쳐나가면 되는데 알랑한 자존심이 무엇인지 그 자존심 때문에 고치지 않고 계속 고집만 피우고 고치지 않으면 나중에는 결국 자신의 영혼의 파멸을 스스로 자초하는 결과만 초래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참으로 그 영혼은 불쌍한 영혼이지 않겠습니까? 저도 이 부분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단지 이런 영혼이 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두서없이 한번 제가 생각한 단상을 말씀드렸지만 한번쯤 이런 측면을 묵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하느님이 아니라서 결론을 낼 수는 없고 단지 이런 부분에 대한 추측은 이 글을 읽는 형제자매님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더 의미가 있고 스스로 한번 답을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저도 계속 끊임없이 한번 답을 찾아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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