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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2.2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2-20 조회수1,948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2월 20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창세 8,6-13.20-22

6 사십 일이 지난 뒤에 노아는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보냈다.

까마귀는 밖으로 나가 땅에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하였다.
8 그는 또 물이 땅에서 빠졌는지

보려고 비둘기를 내보냈다.

 9 그러나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노아에게 돌아왔다.

온 땅에 아직도 물이

있었던 것이다.

노아는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아

 방주 안으로 들여놓았다.

10 그는 이레를 더 기다리다가

다시 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냈다.

 11 저녁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땅에서 물이

 빠진 것을 알게 되었다.

12 노아는 이레를 더 기다려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자 비둘기는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3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22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복음 마르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공지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저는 오늘 이태리 성지순례를 떠납니다.

따라서 새벽 묵상 글이 현지와

이곳의 시차로 인해서 정상적인

 시간에 발송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또한 현지의 인터넷 사정에 따라서

발송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순례 기간 동안에 여러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다녀오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남자가 여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혼수 예물을

부탁 좀 하려고 하는데

 들어줄 수 있어?”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까지 어떤 다툼도 없이

결혼 준비를 했는데 갑자기

혼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혼수 문제로

운다는 것인가?’

 싶었지요. 그래도 우선 들어보자는

생각에 “어떤 예물인데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안 돼.’와 ‘하지 마.’라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예물이 필요해.

이 말은 나와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우리 자녀에게도

사용하지 않겠다는 예물이야.”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이런 부정적인 말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가정생활을

하면서 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할 때

 “안 돼. 하지 마.”

라고 말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남편은 자신을

쳐다보면서 예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했을까요?

자연스럽게 설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 되는 이유,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합니다.
요즘 가족 안에 대화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어쩌면 대화가 끊어질 수밖에 없는

 “안 돼, 하지 마.”라는 결과만을

드러내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러나 설명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화목한 가정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모습을 종종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눈 먼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데요,

특별한 과정이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디의 말로써도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밟으십니다.
먼저,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지요.

그 다음에는 소경의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리고는 “무엇이 좀 보이느냐?”

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소경의 눈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는지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인다고만 말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눈에 손을 대시자

완전히 눈이 밝아졌다고

오늘 복음은 우리들에게 전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곧바로’가 아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천천히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의 중요함을

생각하면서 내 이웃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사람의 태도는 짧은 대화나

 책 한 구절로도 변화될 수 있다.

(제인구달)

(벳사이다 유적지)


기억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마음

제 형님은 기억력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인지 옛날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누가 우리 집에 왔었고,

 몇 년 몇 월 며칠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마치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분명 함께

 하셨을 부모님께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십니다.
우리가 “기억나세요?”라고 물으면,

“그런 일이 있었어? 몰라.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형님이 있지도

 않았던 일을 거짓말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부모님께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저 역시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후배 신부가 신학생 때 저와 함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제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후배들도

 “맞아. 저 형이 그랬어.”라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 아닙니까?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이지요.

단지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기억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아픈 상처의 과거를

 들춰내기보다는 미래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면 어떨까요?

오히려 말의 커다란 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벳사이다 유적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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