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3.0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09 조회수1,951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3월 9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제1독서 이사 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루카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종종 화가 많은 분들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불평불만을 힘 있게

표시를 해야 무시를 당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화를 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화를 많이

표시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을

슬슬 피하지요. 주변에 사람들이

멀어지게 되니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보았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가?”
제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내놓았으나 스승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스승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소리를 질러야만 멀어진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닿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소리를 지를수록 상대방은

더 화가 나고, 그럴수록 둘의

 가슴은 더 멀어진다.

그래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스승은 계속 말합니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

두 사람의 가슴은 아주

멀어져서 마침내는 서로에게

죽은 가슴이 된다.

죽은 가슴에겐 아무리

 소리쳐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더 큰소리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화가 날 때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를 아주 쉽게

설명해주는 글입니다.
생각해보니 사랑할 때는

 큰 소리로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서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소곤소곤 대화를 하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두 가슴의

거리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으로

투덜거릴 때가 많습니다.

이 부정적인 말과 생각이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도

투덜거립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매국노라고 할 수 있는

세리와 부정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죄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철저히 거부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주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의 말씀이 내 가슴 속에서

언제나 크게 들릴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부르제, ‘정오의 악마’ 중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묵상해보십시오)


감정적 반응

고통의 대부분은

실제 그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으로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감정적 반응이 나의 고통을

 몇 배나 증폭시키는 것이지요.
남편의 외도로 큰 고통을

겪게 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헤어질 수 없고,

 신앙인이 이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함께 살고는 있지만,

남편 외도로 인해 깨진

신뢰를 회복할 수 없었고

갈수록 고통만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감정의 반응은

 누가 준 것일까요?

바로 내가 나에게 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심리학자는 이야기합니다.
‘상처에 너무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

아픔에 너무 아파해서도 안 된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잠시 아프고,

잠시 슬프고,

잠시 화가 날 뿐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그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감정을 증폭시킬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모양의 십자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