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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 / 복음서의 형성 과정과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09 조회수3,901 추천수2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 / 복음서의 형성 과정과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오늘은 복음서 형성과 함께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이를 위해 복음이라는 말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복음은 우리 말로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그리스어로 에왕겔리온(euangélion)이라는 것을 옮겨 놓은 것인데요. 원래 이 말은 그리스와 로마제국에서 전쟁의 승리나 황태자의 탄생 또 황제 즉위 등 온 나라가 경축할 만한 기쁜 소식을 백성에게 알릴 때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 집필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친숙했던 표현이예요. 그러나 종교적 용어가 아니라 정치적 용어였다라는 거죠. 즉, 당시 사회 안에서 널리 사용되던 정치적 용어로서 특별히 포로들과 채무자들을 그리고 로마 제국에 반대했던 범법자들에게 어떤 더 많이 알려진, 그러니까 사면령과 같은, 우리로 하면 광복절 특사 이런 개념으로, 그런 범법자들에게 자유를 주던 그런 용어로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용어가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앙 용어로, 종교적 용어로 바뀌게 된 거예요. 이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와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죠. 그리스도인에게 기쁜 소식은 더 이상 세상의 성공과 권력 쟁취가 아니라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것. 이것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 책으로 만들어진 것, 그것을 우리가 복음서라고 하는 것이죠. 복음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까?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책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복음서는 어느 한 사람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전기와 비슷하면서도 또 전기가 아닌, 약간 다른 형태를 띤 독특한 문학 유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제자들을 부르시고 또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치유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또 고난을 겪고 돌아가신 후 그 부활하셨다는 이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 후 곧바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분이 생전에 직접 이루어 주신 말씀과 삶에서 보여 주신 가르침이 먼저 존재했죠. 그리고 나서 그분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은 그분의 삶과 말씀을 설교하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게 40여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아마도 일부는 글로 전해지면서 점차 여러 전승이, 지역적으로도 생길 수 있겠고 또 계파별, 사람들에 의해서도 생겨나는 수가 있겠죠. 이런 전승들이 모여졌던 거죠. 성격별로 그러한 여러 전승들을 복음사가들이 수집을 해서 일관되게 구성을 하고 편집한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즉, 살아 있는 말씀의 기쁜 소식을 글로 체계 있게 정리한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그래요. 복음서의 최종 편집자들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록해서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아버지 하느님에 의해서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최종적으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로 올라가시고 그리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 기원후 한 70년에서 100년 사이에 복음서라고 하는 형태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록해 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본 목격 증인들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마태오나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사도 명단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들이지만 과연 마태오와 요한이 직접 그 복음서를 썼느냐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차원의 일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연구를 우리가 계속하게 되는 거고, 오늘날에는 교회 전승 안에서는 마태오나 요한이 썼다고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의 공동체 제자단에서 썼을 것이라고 보는 거죠. 

 

여하간 그들은 반세기를 걸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안에서 형성된 예수님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예수님 사건에 관한 글을 썼던 것인데 그것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네 복음서의 형성 과정을 다음의 세 단계로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복음서의 형성의 세 단계  

 

첫 번째 단계는, 우리와 같은 역사적 존재로서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공간과 특정한 시간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르침과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정말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팔레스티나라는 공간 안에서 사셨고, 그분이 사셨던 시간들, 기원후 1년부터 30년이든 33년이든 구체적인 시간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셨을 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행동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일들을 보고 당신의 가르침을 듣도록 그래서 제자들을 초대하셨지요. 

 

이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뒤에 이 모든 일들을 세상에 선포하는,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도록 영을 받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기원후 30년 경에 팔레스티나에서 유다인으로 사셨던 예수님께서 동시대의 다른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 가운데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사고 방식과 그들의 이해를 위해서 거기에 맞도록 그 표현에 맞추어 당신의 가르침을 주셨다라는 것이죠.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모든 것을 직접 듣고 목격한 열두 사도들과 다른 증인들이 그들이 듣고 목격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단계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복음 선포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처음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과 함께 계실 때 그분의 말씀을 직접 보고 들었던 제자들은 온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풍랑을 잠재우시는 장면에서도 보면 제자들이 "도대체 바람과 호수를 잠재우시는 저분은 누구이신가?" 끊임없이 제자들도 의문을 가졌습니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이예요.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 후에, 물론 부활한 다음에도 예수님께 야단을 맞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직접 뵙고 나서야,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고나서야 또 성령을 받고 나서 담대히 예수님에 관해서 가르치는. 

 

그러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었죠. 그러나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성령을 받고 나서 눈이 열리고 마음이 타오르고 표현의 능력이 주어지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한층 더 깊이 깨달음을 물론 모두 다른 이들에게 이 모든 것들을 담대히 전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사도들 역시 자신들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환경, 그러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동시대의 다른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면, 제자들이 그분에 대해서 증언할 때는 자신들이 전하는 대상과 자신들이 전하는 곳의 환경에 맞게 상황과 삶의 자리를 고려해서 청중들의 필요와 요구에 맞추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모든 일들을 증언해야 하는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도들은 자신의 이 목적과 이 모든 것을 듣게 될 청중들의 사고방식에 일치하는 설교 양식을 사용하게 된 거예요. 그런 설교 양식이 다양했습니다. 신앙고백문도 있을 수 있고, 노래로 하는 찬미가도 있을 수 있고, 가르침과 권고의 형태 등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다양한 형식들을 활용했다라는 것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예요. 복음 형성 과정의. 이 네 복음서의 제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문자화 되어 전해진, 문서 전승들이나 아니면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구전 전승들 중에서 특정 부분을 취사 선택해서 한 권의 책으로 즉, 자신의 복음 안에 담아서 책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 이것이 바로 복음서의 최종 마지막 과정입니다. 

 

 

바로 이 단계에서 때로는 이런 요소들이 종합되기도 하고 혹은 복음서 독자들의 상황, 그 사람의 자리에 비추어 그 요소들을 설명해야만 했지요. 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계시헌장 19항'은 이를 다름과 같이 우리에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 저술가들은 4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말로 혹은 이미 글로 전한 것 중에서 추리고, 종합하고, 교회들의 사정에 맞추어 설명하고, 마침내 설교의 형식을 취하여 예수께 대하여 언제나 참되고 성실한 것을 우리에게 알리려 하였다." (「계시헌장」19항)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성경책, 성문화된 이 성경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공부하면서 적어도 어떤 과정을 회복하고 싶은 거죠? 역사의 예수를 알고 싶은 거예요. 물론 역사의 예수를 완벽하게 구성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가지론, 결코 알 수 없다라고도 얘기할 수 없는 것이죠. 

 

오늘날에는 많은 학자들이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가 전해 준 성경책을 놓고, 신약 성경을 놓고, 복음서를 놓고 어떻게든 역사의 예수, 처음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고, 신앙 공동체가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전하려 했는가를 연구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구한 것을 제가 여러분들과 이 시간을 통해서 나누면서 지난 역해석 방법에서 본 것처럼 우리 신앙화하기, 자기 것으로 하기 과정을 여러분들이 하는 것이죠. 거기에 이제 저는 학자들이 연구한 역사의 예수, 최소한의 것이죠. 그 신앙 공동체가 남긴 본문의 의미, 이것을 함께 나누는 작업을 제가 방송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 복음서의 의미 

1.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연대기적 순서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집필 

 

자, 이렇게 세 단계를 거쳐서 문자화되어 책으로 만들어진 복음서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발생했던 연대기 순서에  따라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집필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복음서를 보면서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순서대로 갔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실 그런 순서대로 사건이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거예요. 실제 역사에서는.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복음서의 연대기 순은 이걸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마르코입니다. 마르코가 이것을 가지고 첫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마태오와 루카가 그 뼈대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서 더 많은 자료들을 우리에게, 에피소드를 전해주는 것이죠. 

 

그러나 요한은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다른 순서에 의해서 전해 준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에서는 예루살렘 입성 뒤, 거의 수난 사화에 들어가는 부분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라면, 요한 복음서에서의 성전 정화 사건은 처음부터, 요한 복음 2장부터 있습니다. 이건 복음서의 저자가 연대기 순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의도에 따라 공동체 상황에 맞게 재구성했다라는 이야기죠. 

 

그래요. 네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 사건과 그 설명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부터 마지막 제자들과 고별 식사, 최후 만찬까지 실제적 역사적 사건의 시간표 대로 종합 정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라도 각각의 복음서 안에서 그 사건, 그 이야기가 본문 안에 놓인 위치, 또 앞뒤 맥락을 놓고 우리가 그 의미를 파악하면서 그 사건을 읽어야만 참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복음서 의미

2. 예수님의 가르침을 예수님께서 사용했던 단어 그대로 똑같게 전하지 않음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단어 그대로 반드시 똑같게 전달하지 않았다라는 거죠. 예수님 시대의 일상적 구어는 아람어입니다. 바빌론 유배 이후, 남유다 왕국의 몰락,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의 헬레니즘 운동으로 희랍어가 국제 언어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 공생활 중의 국제 언어는 희랍어입니다. 또 라틴어죠. 로마 제국이 들어왔으니까요. 

 

또 히브리어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문자 언어, 성경책의 언어로만 고정화되고 실제 생활 언어는 아람어였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 가서 루카 복음서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를 펼쳐서 읽으실 때 그때 읽었던 언어는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였습니다. (루카 4,18-19 참조)

 

그리고 나서 그 말씀에 대해서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이루어졌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생활 언어인 아람어로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지나고 한참 뒤에, 40여년이 훨씬 지난 뒤에 쓰여진 복음서,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가 기원후 70년경에 쓰여졌으니까요. 예수님이 돌아기시고 부활하신 다음 적어도 40년이 흐른 다음에 복음서가 만들어진 것이죠. 그런데 이 복음서는 희랍어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 당신의 가르침을 맞추시듯,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가르치며 전해야먄 했던 사도들, 그리고 초기 교회 선교사들은 마찬가지였어요. 자신들이 전해야 할 대상, 그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 그 차원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명확히 드러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도 맞추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본 말씀의 의미도 살리면서, 그런 과정의 언어의, 단어의 변화가 필요했는 거죠. 물론 정말로 예수님의 말씀의 본 의미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 복음서의 의미

3. 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각자 나름의 신학적 의도를 가짐

 

자, 마지막으로 복음서 저자들은 각자의 복음서를 집필하는 과정에 서로 다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면서 각자 나름의 신학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마르코 복음서는 로마의 혼성계 박해를 받고 있던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와 이방계 그리스도 신자들의 혼성계였습니다. 더군다나 박해라는 상황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계 그리스도 신자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루카 복음서는 이방인들 중에 개종한 이방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좀 더 성숙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요한 복음서가 쓰여졌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해주는 과정에서도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지역이 어느 지역이냐, 그다음에 그 독자들의 상황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들을 전하면서도 각 복음서 나름의 구분되는 특색와 강조점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 그리고 요한 복음이 지니고 있는 그 나름의 특별성들을 보존하고자 한 권의 책으로 묶거나 종합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어쩌면 그래야만 하는 의무감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복음서의 최종 편집자들이 서로 다른 독자들을 향해 어떤 의도로 주님 말씀과 행적을 전하려 했는가를 음미하고,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실제로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정말로 많이 뜨겁게 타올랐는지, 어떤 성령의 감도가 있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마땅한 자세, 복음을 읽는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느님의 이끄심이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주어지겠지요. 


특히 저희는 마르코 복음서를 통해서요. 기원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과연 누구이신가를 알려고 했던 또 그것을 심어 주려고 했던 마르코와 그 독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마르코 복음서가 왜 이렇게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하고 메시아 비밀, 함구령이 있는지, 마침내 십자가를 통해서 이방인의 입에서 예수님의 정체가 완벽하게 드러나는지 이런 이유들을 다 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복음서 형성의 세 단계와 또 그 과정에서 생각해야만 하는 세 가지 점들, 이런 것들을 살펴봤어요. 지금의 그런 것들이, 지금의 복음서들이 예수님께서 실제 가르침과 행적들을 증언하는 것과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통해서 이 점을 우리에게 아주 분명히 해 주고 있어요.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4복음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데에 주저치 않으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 가운데서 생활하시고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하늘에 올림을 받으시던 날까지 실제로 행하고 가르치신 바를 이 복음서가 충실히 전하고 있음을 확고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주장했고 지금도 주장하는 바이다." (「계시헌장」19항) 


우리는 이렇게 복음서 형성 과정을 통해서 로마 시대의 정치적 용어였던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해방이라는 종교적 용어로 바뀌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복음서란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시 공간 아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바를 초기 교회 신앙 공동체가 신앙 안에서 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바를 구체적으로 살며 선포한 뒤에 그것을 성문화 형태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자, 이를 바탕으로 마르코 본문 안의 상황 즉, 예수님께서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 즉,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를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는 복음서 본문 안의 상황은 다름 아닌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예요.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서 양식이라는 최초의 틀을 갖춘 작품이고요. 그 복음의 시작도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복음의 주체이면서 선포되어야 할 대상인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자리, 요 삶의 자리인 팔레스티나를 알아보는 것. 참으로 중요한 것이죠. 


자,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이야기에서는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대왕에 대해서 좀 먼저 이야기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중해에 새롭게 강대국으로 등장한 로마의 카이사르는 이두매아 혈동인 반유다인 연합군 대장 안티파테르를 로마에 종속된 유다주의 행전관, 총독으로 임명해요. 


하지만 공화정에서 제정을 꿈꾸며 개혁을 추진하던 카이사르가 살해되고 다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세력 다툼을 할 때에 바로 이 안티파테르의 아들 헤로데 대왕이죠. 헤로데는 로마 통치부 즉 양진영 모두에게 열심히 조공을 바칩니다. 그래서 그들의 환심을 사 유다 지역의 봉분 왕이 되지요. 


* 헤로데 대왕 (Herodes Magnus) : 기원전 37-4년 유다 지방의 봉분 왕 

 

게다가 악티움 해전에서 그 직전 옥타비아누스를 지원하면서 안토니우스와 결별하고 그 전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서 헤로데는 더욱 입지를 굳게 하게 됩니다. 이후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증축하는 일을 벌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의든 타의든 이 헤로데를 헤로데 대왕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헤로데 대왕은 기원전 37년부터 4년까지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요. 타고난 건강과 지략을 바탕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빈틈없고 잔인했던 헤로데는 자기가 지배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권위와 오만을 마음껏 드러내는 반면, 로마, 그 권력자들 앞에서는 맹종과 충성을 약속하죠. 그런데 문제는 이 헤로데 대왕이 죽기 전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그 과정에서 헤로데 대왕이 보여준 모습, 우리는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잘 알지요. 특히 그 잔혹성, 예수님 탄생할 때에 예루살렘 근방의 모든 영아들을 살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로마에 의한 평화라는 듯, 팍스 로마나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보면 결코 평화롭지 않았어요. 로마의 입장에서는 평화의 시대지만 팔레스티나의 유다인들 입장에서는 평화롭지 않았다는 거예요. 예수님 탄생에도 많은 아이들이 죽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평화가 되겠어요. 잠시 동안만 평화로웠던 거죠. 

 

* 헤로데의 세 아들 :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리포스 

 

여하간 헤로데 대왕이 죽은 뒤에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 아르켈라오스와 헤로데 안티파스, 필리포스에 의해 분할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던 갈릴래아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다스리게 되지요.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로데 대왕 못지 않게 교활했고요. 야심 많은 통치자였고 또 건축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에 세워진 셉포리스와 티베리아스가 대표적인 그의 작품이죠. 로마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바쳐진 도시였습니다. 특히 헤로데 안티파스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살펴보겠습니다만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인물이죠. 

 

한편으로 헤로데 대왕의 큰아들 아르켈라오스는 정권 유지에 실패합니다. 정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정을 하면서 로마 제국에서 쫓겨나게 돼요. 그러면서 그가 다스렸던 유다 지역에 로마 행정관이, 총독이 부임하는데 이것이 바로 총독정치입니다. 총독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중요한 일 모두 그들의 법정에서 다뤄졌고, 특히 그들은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고, 그들이 내린 언도는 군사들이 집행하였습니다. 

 

로마 총독은 로마군의 장교들을 거느렸고 자기 통치지역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어요. 주로 카이사르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파스카 축제 등 큰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던 거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나 감시하기 위해서 간 것이예요. 특히 예수님의 재판과 죽음, 과월절 축제 때죠. 이때 올라와서 예수님을 심문했던 이가 바로 본시오 빌라도 총독입니다. 그는 기원후 25년-35년까지 이 지역의 로마 총독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로마 총독 정치가 이루어진 팔레스타니에서 로마의 정치 세력과 관계하며 나름대로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리던 유다인들 그들이 바로 예루살렘 최고 의회, 소위 말해서 산헤드린이라고 하지요. 왜내하면 이 예루살렘 산헤드린을 우리가 좀 기억해야 될 이유가 있지요. 종교 지도자들 즉, 대사제를 중심으로한 사제들은 빌라도가 축제 때마다 사용하는 사면 카드를 이용해서 바라빠를 놓아 달라는 대신 예수를 죽여라 이렇게 사용했던 것입니다. 

 

* 예루살렘 최고 의회(산헤드린) : 로마 총독정치 시대 때 권력을 휘두르던 유다의 최고 의결 기구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에서 이 최고 의회를 꼭 기억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산헤드린, 최고 의회, 유다의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신약시대 유다교의 초고 통치기구였죠. 비록 팔레스티나가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어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지만 이 산헤드린 예루살렘 최고 의회 유다인들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어요. 이 최고 의회에서 종교적, 법률적, 행정적 일들을 처리했고, 경제적인 부분도 좌지우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한 자치권과 권위를 허용했다는 거죠. 로마제국이 산헤드린 최고 의회에. 

 

하지만 우리가 성금요일 수난 예절에서 봉독하는 요한이 전하는 수난기에서 볼 수 있듯 최고 의회, 산헤드린은 사형권이 없었어요. (요한 18,31 참조) 로마가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만 힘을 행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형 같은 중대한 형벌의 경우 로마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했던 거죠. 


이 최고 의회도 유다인들의 1차 항쟁으로 인해서 로마제국에 위해 성전 파괴 이후 성전이 파괴되면서 최고 의회도 사라지게 되죠. 그 결과 성전 파괴로 사제 계층, 사두가이가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 최고 의회는 이런 예루살렘 성전에서 회합을 가졌는데요. 그만큼 성전은 유다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물론 신약시대에 와서 유다인들의 생활에서 성전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은 회당이었습니다. 


* 회당(會堂) : 팔레스티나 '공동체 생활의 중심', '유다인들이 기도하는 곳'을 가리킴 


그래서 상대적으로 성전의 중요성이 구약 시대에 비해서 덜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여전히 유다인들의 삶의 구심점이었고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었다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예수님께서도 이 성전에 늘 가셨지요. 바로 열두 살  소년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갔던 것, 루카복음에서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고, 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고 성전에 봉헌되는 것, 유다인들의 정결법 예식대로 루카복음에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는 부분도 우리가 볼 수 있고요. 


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제일 먼저 가신 곳도 성전이었고, 그래서 성전 정화사건을 일으켰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뭡니까? 환전상들에 의해서, 상인들에 의해서 엉망이 된 성전을 향해, '하느님의 집, '내 아버지의 집', '기도의 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한 사랑과 열정 때문에 그곳을 정화하셨고, 특히 예식을 부패하게 만드는 형식주의에 대해서 비판하셨던 거죠.(마태 12,6 참조)


* 성전(聖殿) : 하느님의 집,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던 신전. 

예수님은 '하느님의 집', '내 아버지의 집', '기도의 집'이라 부르심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 민족 사상 가장 혼란이 심한 시기에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어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외치시며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 사회에 대해서 다음 시간에는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지도자들 집단들, 그룹들, 분파들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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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 복음서의 형성과정,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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