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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기석 신부/ 예수님 시대 지리적 배경, 복음서 안에 담긴 신학적 주제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5 조회수1,951 추천수2 반대(0) 신고

박기석 신부 /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제6강 

 

 

제6강 예수님 시대 지리적 배경, 복음서 안에 담긴 신학적 주제 

 

안녕하십니까? 복음의 시작 마르코가 전한 예수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마르코 복음의 집필, 저자, 시기, 장소 그리고 내적 순서에 따른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 안에 담긴 예수님의 삶을 어떤 지리적 배경에 따라 살펴보고 그러면서 그 주요 신학적 주제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 예수님 시대의 지리적 배경  

 

우선 지리적 구조에 따른 복음서 구조와 내용을 살펴봅니다. 대략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시작해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활동하시던 갈릴래아 활동기, 마르 1ㅡ9장입니다. 또 갈릴래아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그 노정을 담은 예루살렘 상경기인 마르 16장.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예수님 스스로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서서히 밝히시며 활동하시는 예루살렘 활동기인 마르 11ㅡ13장,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다루고 있는 수난기인 마르 14ㅡ16장. 이렇게 해서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수난기를 시간적으로 볼 때 이틀 사이에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공적 시간들, 공적 주님의 시간들에 비교할 때 유난히 그 분량이 많습니다. 이는 예수님 정체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느라 그리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르코를 도입부가 붙은 수난 사화, 긴 서문을 가진 수난 이야기.' 이렇게 특징 짓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지요. 

 

* 마르코 복음 ; 도입부가 붙은 수난 사화 (긴 서문을 가진 수난 이야기) 

 

즉 1,1절 "하느님의 아드님과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님의 호칭으로 복음을 시작하고 있고, 그 분기점으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인 8,29절에 그리스도라고 하는 신앙 고백이 있었고, 또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인 15,39절. 이 연결 과정에서 어떤 지리적 구조들이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조의 틀에 각 시기마다 예수 전승들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고, 그가 세운 이 지리적 구조가 훗날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도 연결이 되어서 마태오와 루카가 이 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라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복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복음서 양식의 틀을 처음 제공했다는 겁니다. 

 

다만 이 지리적 구조가 이야기의 흐름에 여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복음서의 내적 순서를 드러내는 것은 아님을 여러분들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먼저 이야기의 내적 흐름에 따라 먼저 설명을 드렸던 거예요. 그래서 이런 지리적 구조와 함께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연결을 시킨다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시는 과정이 처음 전반부는 함구령이 내려지면서 메시아 비밀로 유지되었다가 예루살렘 상경 뒤부터 서서히 밝혀지고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온 천하에. 바로 그런 신학적 교의적 지표가 함께 연결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전승과 또 찾아낸 사료들을 바탕으로 제일 먼저,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에 누군가에 대한 인물전을 시작할 때 사용되던 도입문 중에 하나를 마르코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어떤 내용, 이야기 안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기재를 뽑아서 상징적으로 책의 제목으로 잡는 그런 형식인데, 이것을 이니치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 1,1절이 뭡니까?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지요. 이것이 바로 이니치움을 사용한 흔적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주제로 제목을 만든다는 것. 

 

* 이니치움(lnitium) : 내용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뽑아 상징적으로 책의 성격을 밝힘 

 

8,29절에 베드로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15,39절 마지막에 이방인 백인대장의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이 두 가지의 주제로 제목을 갖다 쓴 거죠. 그러면서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님이 복음의 시작이다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복음서 마르코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죠?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데 그분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어디서 드러나냐? 십자가다라고 하는 것. 이게 마르코 복음서의 의도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 아주 미시적 수준에 따른 것인데요. 마르코 복음의 구조와 내용, 흐름에 대한 독특하고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어요. 무엇이냐 하면, 끼워 넣기 입니다. 이걸 달리 표현하면 샌드위치식 구성이라고 하는데요. 여러분들 샌드위치 어떤 빵입니까? 식빵 위에 여러 가지 내용물을 올려 놓고 마지막에 겉에 또 식빵으로 합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내용물이 많을수록 맛있는 거예요. 이처럼 마르코가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인위적 구조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 마르코 복음서 ; 샌드위치 구조(한 이야기에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기) 

 

즉, 복음서 여러 곳에서 마르코는 한 이야기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고 있어요. 달리 말하면 두 이야기들이 다른 이야기들을 에워싸도록 서로 일정한 공간을 허용하는 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삽화를 잠시 멈추고 다른 장면을 삽입한 뒤 다시 처음의 삽화로 돌아오는 배열이라고 하면 더욱 쉬운 설명이 되겠습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는 마르코 복음에서 일곱 번 이상 찾아볼 수 있는데, 전승들을 서로 엮어 짜는 양식에서 우리는 마르코의 신학적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런 전술적 전개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르코는 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친척들의 방문 이야기 사이에 율법 학자들과 벌인 논쟁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3장이죠. 여기에서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악령에 사로잡혀 악령의 힘으로 병자를 치유한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마르 3,25) 따라서 마르코가 가정의 주제를 상이한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반대하는 실제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악마의 세력에 사로잡힐 경우 갈라질 위험이 있는 공동체의 가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는 항상 결정적인 진술이 담겨져 있는데 마르코는 마귀, 더러운 영, 미신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도록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바로 11장입니다. 마르 11,12-14과 11,20-21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이 정체 모를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철도 아닌 때임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 앞으로 다가가십니다. 물론 열매도 달리지 않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저주를 퍼부으세요.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마르 11,14) 

 

그런데 11,20-21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다시 무화과나무 근처로 돌아가시게 되고, 뿌리째 말라 죽어버린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예언이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 사이에 있는 11,15-19절의 성전 정화 사건 즉,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시어 행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시는 이야기, 성전 정화 사건에 의해서 나누어져 전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하느님 나라의 실현들에 반대하는 것들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을 하시는 그런 사건이지요. 바로 이 사건과 함께 예수님은 당신의 반대자들과 최고 절정의 갈등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 이후에 그 결과를 보고 성전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 대사제들이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없앨 방법을 찾지 않습니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마르 11,18) 

 

그렇습니다. 두 이야기 즉,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정화 사건의 결합을 통해서 마르코는 그의 독자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예요.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해석해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르코는 그의 복음 전체를 통해서 이런 샌드위치 구성, 이런 삽입 기술을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를 통해 마르코는 신학자로서 또 그가 전해 받은 여러 전승들을 혼합시킴으로써 인위적 구조로 그의 창조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 마르코는 신학자로서 그가 전해 받은 여러 전승들을 혼합시킴으로써 그의 창조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화과나무 저주가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어떤 종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완성을 거꾸로 보여 주면서 그 갈등에 의해서,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일, 하느님의 나라 도래가 이런 것이다는 것을 보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이야기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이야기 흐름에 따라 또는 지리적 구조에 따라 거기에 미시적 수준으로 샌드위치 구성까지 봤습니다. 마르코가 이런 인위적 구조를 통해서  또는 지리적 구조를 통해서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고 했는가? 주요 신학적 주제들을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 마르코 복음의 신학적 주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이렇게 1,1절은 그야말로 오케스트라가 심포니를 연주할 때 그 시작을 장엄한 서곡으로 하듯, 복음의 시작을 웅장하게 하였던 마르코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 하는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의 선포로 복음서의 방향을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을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십자가를 향해 외롭지만 꿋꿋이 걸어가시는 예수님 당신의 길을 제시하시고, 또한 이 길을 함께 따라야 하는, 예수님을 본받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해하지 못하고 흔들려도 꿋꿋이 주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제자론, 참된 제자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론과 제자론, 이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15)라는 이 선포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온전히 갖게 하는 이스라엘에게 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을 힘차게 드러내시고자 확실하게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선언이지요. 거기에서 예수님의 출현을 기다라고 고대했던 인류의 희망의 어떤 실현을 제공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예수님의 출현, 하느님이 사람이 되심과 그 출현의 중심에는 다름 아닌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절정이 바로 수난과 죽음,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가르침, 치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심 그리고 그밖의 다른 모든 그분의 행위들에 대한 연관성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거행됐던 곳에서 이방인 군인 즉, 예루살렘 백인대장의 증언을 통해 그때서야 명백하게 그분이 누구이신가가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르코 복음 14장과 15장에서는 오직 한 가지 이야기, 예수님의 수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부인 1ㅡ9장의 긴 시간 동안에 예수님이 여러 갈릴래아에서 활동했던 것보다 단 며칠 그야말로 11ㅡ16장까지는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지는 것을 상당히 자세하게 긴 분량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을 우리는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마르코 복음의 가장 큰 특징 : 십자가 신학 

 

예수님의 수난 부활 예고 (마르 8,31). 마르코 복음의 분수령이 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과 또 신분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서 더욱더 예수님을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거듭 두 번을 더 언급하시면서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느님의 일을 이루시고자 십자가를 향해 걸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 뒤에는 언제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에 갖추어야 할 자세가 조건과 함께 제시되어 있습니다. 전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조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현세의 영광과 안일한 삶에 유혹을 받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던져준다고 하겠습니다.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비통한 마음을 함께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오히려 스승을 모른다고 잡아뗐던 것처럼,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너무나 쉽게 십자가를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 또 다시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처럼 십자가 신학은 마르코 복음에서 매우 치밀하고 특이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구조상 보면 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신분이 강조되면서도 언제나 대중 앞에서는 드러나지 말아야 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을 다루는 후반부에 들어서는 특히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치유한 이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서서히 드러납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의 제자들에게, 그다음 최고 의회에서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예루살렘 주둔 로마 백인대장의 증언을 통해서 온 대중 앞에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분의 신분, 메시아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코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꼽히는 메시아 비밀입니다. 


실제로 마르코의 공동체가 갖고 있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예수님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답하는 일 즉, 예수님의 정체성 설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까?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면서, 메시아, 구원자이시라는데 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하느냐? 


십자가 형이란 당시 로마제국 통치하에서 아주 끔찍한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이 십자가 형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처형이란 단지 생명의 박탈일 뿐만 아니라, 눈과 귀와 생각마저도 말살시키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은 입에 올리기조차 꺼렸던 그 표현이 십자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끔찍하고 처참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도 신명 21,22-23에서는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무에 매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인들에게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버린 자, 하느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하느님께 저주받은 분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일으켜지신 분,  부활하신 분이 된 것이지요. 

 

그러기에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이라고 바오로 사도가 1코린 1,23절에서 십자가의 지혜에서 얘기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걸 확인해야 되는데 그것을 첫 번째 복음서에서 마르코는 강조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왜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그리스도이고 인류의 구원자 예수에게 주어졌는가를 바로 초기 교회 선교사들은 신앙인들에게 또는 예비신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도 우리가 믿고 고백하고 선포해야 되고 증거해야 될 케르그마,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마르코는 이른바 메시아 비밀이라고 하는 신학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집필했던 것입니다. 전체 구성을 즉, 내적 흐름에  따른 이야기로 전개든, 지리적 구조든, 샌드위치 구조든 바로 이 주제에 따라 맞추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비록 복음서의 표제도 1,1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 정체성을 공생활 초기 단계에서는 예수님께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으로 해서 마지막 십자가를 통해서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드러나도록 하는 그리스도론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선 다음의 두 가지 관점에서 우리는 메시아 비밀, 십자가의 신학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당신의 인격에 관해서 무엇인가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침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게 함구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왠지 자신의 정체를 공생활 동안에 철저히 숨기려고 하십니다. 

 

더욱이 둘째,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공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다가 공생활 말기에 이르러 하느님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나서야 당신의 참 정체성을 환히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침내 고발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는 그 상황에 가서야 비로소 메시아로서 나태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사제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카야파가 예수님께 어떻게 심문합니까?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마르 14,61)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렇다."(마르 14,62) 하고 공적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인정하십니다. 처음으로 당신의 정체성을 밝히십니다. 유일하게 예수님이 마르코 복음서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는 걸 처음 밝히시는 장면입니다. 

 

로마제국 유다 총독 빌라도의 심문에서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마르 15,2)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역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음을 맞이한 후,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백인대장을 통해서 만 천하에 이 사실이 공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 물론 그분의 머리 위, 십자가 위에 붙어 있던 죄명 형태도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의 의도입니다. 왜 그분이 처음에는 함구령을 내리셔서 밝히지 않으셨다가 심문을 받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인정하시고 그렇다고 처음으로 선언하시잖아요. 그리고 사실 맞는 얘기고요.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데 사람들은 그것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는 데에  쓰고 있었고, 그리고 죽은 뒤에야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잖아요. 왜 이렇게 하셨는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 그분의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스스로 언표 하지 않으십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렇게 엄명하신 이유에 관해서는 그분 자신이 8,31,-33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바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표상하고 있는 메시아를 정면으로 예수님은 거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하십니다. 즉,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언제 메시아로서 당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공개하시는가? 말씀드린 대로 대사제의 질문에 답하시면서입니다. 

 

* 마르코의 신학적 의도 :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숨겨졌다가 종국에 드러나는 것 

 

그렇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정체가 비밀에 부쳐졌다가 후에 예루살렘에서 밝혀진다는 신학적 의도는 결국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투영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숨겨졌다가 종국에 드러나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도 비록 겉으로는 실패해 보이지만, 결국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마르코의 신학적 관점이 심화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십자가 자체는 모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실패한 인생으로서 허망하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담고 죽으신 것이지요. 바로 십자가 사건에서 메시아 비밀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행해 걸어가시겠다고 결정하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예고도 그때서야 올바로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 십자가 사건에서 메시아 비밀 : 예수님께서 수난을 향해 걸어가시겠다고 결정하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

 

그래서 비밀에 대한 함구령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이유로써, 수난의 필요성도 호소력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비밀을 지켜 달라는 당부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의 내용, 당신이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이 일종의 인간적인 승리로 끝날 수 있기에,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한다(마르 8,31)는 예수님의 그 말씀은 구약 성경을 통해 표현된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르시기 위해 당신의 영광을 감추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메시아 비밀 신학은 수치스러운 사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저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일종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메시아 비밀 신학 : 수치스러운 사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일종의 수단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의 몰이해에 관한 주제는 마르코 교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믿음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수난과 고통을 피하려 하고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려는 그 인간적인 욕망을 떨쳐버리도록 촉구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만 했던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않으려 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걸어가신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 그 사실조차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받고 있는 유혹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메시아 비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번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난 실패가 아니라, 다시 살아나고 다시 살려내는 생명의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일생을 마감하셨지만 아버지 하느님에 의해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분이 뿌려 놓은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내셨다라는 것입니다. 마르코가 십자가와 메시아 비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놀라운 희망이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습니다. 이제 마르코는 이런 주제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을 이루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수행해야 할 봉사와 고통의 참된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마르코 복음서가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즉, 박해 상황에 직면해 고통 속에 있는 독자들하고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다시 한 번 마르코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어떤 식으로 정립되어야 될지를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박기석 신부, 마르코복음, 메시아 비밀사상, 함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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