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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3.1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6 조회수2,14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3월 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신명 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복음 마태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어렸을 때에는

참을성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70명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손해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친구들과 다투곤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서 절대로

 넘어오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도 하지요.
이렇게 어렸을 때를 떠올리다가

 초등학생 때 친구와 크게 싸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장난을 하다가 한 친구를

툭 치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왜 때려!”라면서

화를 냈고, 저는 저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그래, 그러면

너도 한 대 때려.”라고 말을 했지요.

나도 한 대 맞으면 공평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한 대 때렸는데

너무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냥 툭 친 정도였는데 말이지요.
이 친구의 행동으로 인해서

오히려 제가 손해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세게 때려?”라고

 말하면서 저 역시 세게 때렸고,

결국 서로 치고 박는 큰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평하다’라는 말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정확함일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눈에 보이는 물건의 정확한

나눔 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마음이 받은 상처의

크기에 따라 누가 더 큰 아픔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자기 아픈 것이

가장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공평함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의 공평함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평함은 자로 재서

정확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조건

사랑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세상의 관점으로 공평하게

심판하신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안에서

살아 숨쉬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평함은 죄가 많으니까,

또 당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니까

“너는 못되게 살았으니 사랑을 줄 수 없다.”

라는 세상의 공평함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똑같이 주시는 사랑이

주님의 공평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공평함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의 사랑을 받았으면

나 역시 딱 하나의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받든 받지 않든 상관없이

무조건 주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나는 매일 이렇게 되뇌었어.

“오늘도 나는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오스카 와일드)

(천사같은 사람이 됩시다)


뒷담화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이

특히 믿었던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어떨까요?

아마 이런 두 가지의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소문이 난거지?’
‘내가 인생을 헛살았나?’
그런데 이런 생각에만

머물러 있으면 절대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뒷담화를 수집하되 그대로 믿지 마세요.

주관적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이니까....
2) 전달자의 의도를 확인해보세요.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해야 합니다.
3) 못들은 척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괜한 가슴앓이를 해봐야

무엇 하나 바뀌지 않습니다.

뒷담화를 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잘해주십시오.

큰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저께 강의 했던 대구의 수성성당)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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