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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응답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8 조회수1,208 추천수1 반대(0) 신고

 


응답

샤를 푸코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간 바로 그 길을 갔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처럼 회개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했으며,

사업도 가정도 원치 않고 오로지

말씀의 증거만을 원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시기에

세상과 교회를 위해 살았습니다.

나는 자주 사하라 사막의 신비가와

아씨시의 성인,

이 두 사람 사이의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거듭되는

이러한 유사성의 동기에 대해

물음을 던지곤 했습니다.

이제, 내게 그 대답은

간단해 보입니다.

두 사람 다 종교적,

사회적 모순 자체가

복음의 진실한 회귀를 요청하는

역사적 시대를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와 샤를 푸코,

두 사람 다 복음을 생활하기를

노력하고 나자렛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함으로써 그들의 시대가

요청하는바에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아주

인간적이었기에 한 가지로

그 당시의 시대적 모순과

복잡한 요청을 가난과

보편적 사랑이라는

두 개의 개념 안에 응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두 사람의 비밀,

곧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모든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갖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전도시켜

그들 가까이에 모여들게

할 수 있었던 비밀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고 가난을 믿었으며,

가난한 사람들답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사랑할 수 있었고,

국경을 초월해서 사랑할 수 있었으며,

모든 민족과 문화와 종교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은 가난한 분이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어떤 한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한계를 나누기 위해,

빵을 구하는 사람을 짓누르는

힘겨운 현실을 피부로 체험하기 위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의 고뇌에 찬

불안감을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

가난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음은 사랑을 위해 산 사람의

가난을 높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춤 중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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