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용서와 사랑에 대한 단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19 조회수1,342 추천수0 반대(0) 신고

 

 

지난 토요일에 영화 웨이백에 대한 스토리를 올렸습니다. 그 스토리를 다른 카페에 오랜만에 올렸습니다. 그 카페에서 활동하는 자매님이 가톨릭 굿뉴스에서도 활동을 하십니다. 그분이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댓글 내용은 이렇습니다.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올려주신 내용으로 봤을 때 용서하기 위해서 아내를 만나러 갔다기보다는 아내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갔다는 그 마음이 더 와 닿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하니 보고 싶네요.

 

또 한 분은 이런 댓글을 다셨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아내가 고의적인 나쁜 의도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고문 때문에 그랬으니 용서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를 해야 하는 건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라는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저는 이 두 댓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더 이 영화의 스토리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먼저 용서라는 의미에 대해 사전적 정의를 한번 찾아봤습니다. 우리는 어떤 용어에 대해 그 말이 가지는 뜻은 대략 알 수 있지만 정확한 사전적인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기에 때로는 우리 사람은 언어로 소통을 하기에 또 언어는 정확한 사회규범의 틀 안에서 서로가 정한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가 전달될 때만이 정확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용서의 의미를 찾아봤습니다. 먼저 이렇게 나옵니다.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줌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용서라는 정의에 대입해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용서를 하려면 지은 죄나 잘못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나온 부인은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증언을 한 걸 죄로 볼 수 있느냐 또 아니면 잘못으로 볼 수 있느냐입니다. 세상적인 법학의 관점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법학 중에 형법이 있습니다.

 

형법에 보면 강요된 행위라는 관점으로 법을 서술한 게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범죄가 성립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충족이 되어야 범죄가 성립됩니다. 제가 전문적인 것을 논하려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설명을 드리자면 세 가지 요건 중에 책임이라는 게 있습니다. 강요된 행위는 형법에서 책임조각사유에 해당되게 되면 즉 책임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범죄성립 조건을 결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이런 사유가 있다면 형법적으로 범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형벌권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건 세상적인 학문의 관점에서 한번 살펴봤습니다.

 

세상적인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죄를 언급했습니다만 이제는 그냥 법 이전에 인간적인 관점과 양심의 법이라는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굳이 세상의 법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 부인의 행위를 죄로 볼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본능적으로 생존에 대해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공포심을 갖는 건 본능적인 일입니다. 사람은 또한 공포라는 심리 상태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만약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보통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 본성을 초월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럴 때는 분명 그런 생존의 공포 속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비근한 예가 있습니다. 바로 콜베 성인입니다.

 

콜베 성인도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때 사실 두렵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을까요? 저는 정말 그 성인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을 할 수는 없지만 있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다만 그런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동안 목자로서 사제로서 살아오셨고 또한 신부님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 여정과 또 자신이 살아갈 인생 여정이 바로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그 길을 걷는 게 더 자신의 삶이 그때 성인의 자신의 신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셨을 것이고 이런 믿음에 바탕을 둔 이성적인 생각이 그런 두려움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 있는 공포의 상황도 극복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건 정말이지 누구나 할 수가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말 오랜 기간 믿음과 신앙으로 정신이 단련되지 않으면 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사례를 들자면 바로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이라고 해서 그분들이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그런 두려움도 믿음과 신앙으로 그런 두려움을 이겨냈을 겁니다. 만약 이런 걸 누구나가 할 수가 있다면 오늘날 순교자들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존경스러움은 덜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분들이 걸어가신 길을 보면 보통의 평범한 범인이 봤을 때는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비범한 길을 가신 분의 기준으로 보지 않고 평범한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부인은 그냥 평범한 한 가정의 아내였습니다. 물론 남편을 위해서는 정말 진실을 말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고문이라는 그런 고통 앞에서는 남편이라는 그런 특수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거짓 증언을 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살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단지 그 고문의 고통이 더 힘들었고 그걸 이겨내기가 힘들었기에 거짓 증언을 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한다면 최소한 이 여인의 그때의 심리상태가 인간적인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서 행해졌다면 아마 돌을 던질 수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이것도 확률적으로도 아주 작습니다. 근데 그때 그 여인은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괴로움 속에서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인간적으로 돌을 던진다면 그건 인간적으로 너무 가혹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 여인인들 그런 상황을 자신이 자초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정말 그런 상황이 일어난 그 여인에게도 하나의 비극적인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일련의 모든 상황을 다각적으로 판단해봤을 때 이 여인에게 비난의 돌을 던진다는 건 인간으로서 어쩌면 잔인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수용소를 탈출한 남편의 탈출기를 보면서 이 여인은 세상적인 법의 관점에서든지 아니면 인간적인 세상의 양심의 어떤 법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이 여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래서 저는 용서라는 관점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바라봤는지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무난한 정의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런 정의를 바탕으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영화이지만 영화가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했다고는 하지만 그 한 편의 영화가 모든 걸 다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그런 부족한 부분은 영화를 관람한 사람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메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이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겠다는 마음으로 탈출을 시도해서 모험을 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물론 이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 남편이 탈출을 해서 아내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건 바로 아내의 고통을 생각하고 그런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일념의 생각만 있었기에 바로 그런 아내를 향한 극진한 사랑의 힘이 있었기에 아내를 극적으로 만날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을 한번 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바로 보이지 않는 힘이 하나 더 있었을 겁니다. 바로 신의 가호도 함께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분명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좋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글의 여운이 좀 더 오래 가고 또 이 주인공들이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가 신이라고 표현했어도 그 신이라는 말은 바로 하느님과 동일한 말입니다. 단지 표현을 좀 더 시적인 여운을 남기고 싶고 그래야 좀 더 이 이야기를 더 감동적인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가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관점이 다양합니다. 그래서 정답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게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건 제가 정답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왜 제가 좀 더 이 영화를 용서라는 관점보다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제가 바라봤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좀 더 상세하게 제 생각을 피력했을 뿐입니다. 다만 생각은 이글을 읽는 분들의 몫입니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으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