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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또 한 사람의 탕자임을 깨닫게 될 때에 /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3 조회수1,349 추천수2 반대(0) 신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 박물관에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그림이 있다. 거기에는 방탕 끝에 돌아온 작은아들이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 누더기 옷, 다 해진 신발, 상처 난 발바닥은 그가 집 떠나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보여 준다. 그의 머리는 막 태어난 아이처럼 삭발인데, 이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 준단다. 동생을 안고 있는 아버지모습에 큰아들은 어둡게만 처리되어 있다. 그 얼굴에는 시샘과 질투, 그리고 분노가 찼다. 아버지 행동이 못마땅한 것일 게다. 아들을 안은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다. 왼손은 크고 강인하여 세상의 그 어떤 위험에서도 아들을 보호해 줄 아버지 손이다. 오른손은 작고 부드러워 아버지가 다 품지 못한 사랑을 섬세하게 품는 어머니 손이다. 집 나간 놈을 기다리다 늙어 버린 아버지 얼굴 모습이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안도감으로 자비롭고 평온하다. 그러나 한쪽 눈은 집 나간 아들이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눈물로 지샌 거의 실명 상태다. 그렇지만 눈가에는 분노가 아닌 사랑이 가득하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흔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란다. 죄 지은 작은놈을 주인공으로 보는 게다. 그런데 또 어떤 이들은 큰아들 비유라고도. 이는 동생보다 줄곧 아버지 종으로, 아버지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큰 얘를 주인공으로 여긴단다. 허나 방탕함을 모르는 큰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가 하느님을 제대로 모른다는 메시지도 어쩜 더 중요할 수도. 그러나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자비로운 아버지일 게다. 두 아들이 주인공이 아닌, 그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아버지라는 거다. 비록 작은애가 큰 죄 지었음에도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큰애가 화났을 적에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며 자신과 그를 따로가 아닌 하나인 양 대하는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만이 가장 큰 메시지로 여겨지니까.


사실 우리도 때로는 작은 얘처럼, 때로는 큰아들마냥 산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 나간 뒤로 하루도 그 얘를 잊지 못해 떠난 그 길을 끝없이 보았으리라. 멀리 간 아들향한 그리움은 눈물이 되어, 그 흘린 눈물로 눈은 짓눌렀으리라. 저 멀리 길모퉁이를 돌다온 몰골이 달라진 아들을 안고 기쁨에 겨워 춤추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 죄인이 돌아오기를 마냥 기다리신다. 또한 우리의 자그마한 회개도 크게 기뻐하신다. 지금도 그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다리신다. 반면에 부서지고 깨지고 잘못하고 죄를 짓고, 사순 시기마다 회개한다고 또 애를 쓰지만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좌절한다. 이것이 우리 모습이다.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찾는 우리를 기꺼이 맞아 주신다. 이 시기만이라도 그분을 꼭 기억하자. 그래서 고향의 오솔길처럼 포근한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자. 그곳은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다.

 

재산을 분배받아 나간 작은아들이 타락생활 끝에 집에 오자,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따뜻이 맞아들인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잔치까지 벌이는 것을 보고는 화를 막 낸다. 자신은 지금까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종처럼 일만 했다나. 그런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걸 일러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작은아들은 집나가 방황 끝에 비로소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그 값어치를 몰랐다. 몸은 아버지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종살이하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얽어맨 몸이니까. 큰아들도 마음으로는 동생처럼 세속의 재미를 듬뿍 즐기고 싶었던 게다. 그는 겉으로만 보면 집 안에 머물면서 아버지 잘 섬기고 충실하게 일하는 효자였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작은아들과 다를 바가! 단지, 하나는 집 떠났다가 깨달음을 얻은 탕자이고, 다른 하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도 깨우치지 못한 탕자라는 차이 뿐이니까. 우리 역시 몸은 주님 성전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밖에 나가 있을 때가 더 많다. 어쩌면 방황했던 작은아들보다, 안에서 방황만하는 우리에게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게다.

 

이렇게 이 작은아들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으며, 동생을 용서 못해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큰아들 모습 또한 우리 모습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죄악을 헤아리시기에, 여기에 자유로울 이는 아무도 없을 게다. 그분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늘 일으켜 세우신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을 바르게 안고 가야 하리라. 이것이 곧 사랑뿐인 그분 마음이기에. 되찾은 아들 비유에서 충실하게 살아온 큰아들보다, 아버지 품에 안겨 참회의 눈물 흘리는 작은아들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 넘치는 그분 사랑이 그를 깨끗이 씻어 주기 때문일 게다. 누가 뭐래도 이 사순 시기는 참된 회개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자비를 구해야 할 또 한 사람의 탕자임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되찾은 아들,탕자,용서와 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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