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3.2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3 조회수1,81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3월 23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미카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음악을 잘 듣지 않는 저입니다.

그러다보니 요즘 노래를

잘 알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나온 지가 꽤 오래된 노래를

신곡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음악을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음악을 들으면 집중하기가

힘들어서 듣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음악과

멀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뚝뚝 흐르는 것입니다.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저도 감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분명히 제 몸인데,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내 자신에 대해 무지하고

또 자기 자신과 서먹서먹한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내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특히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오해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먼저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

문헌에서 상속재산을 미리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 커다란 죄입니다.

작은 아들이 죄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계속 이어지는

이교도와 어울리고 타락한

행동을 하는 것,

돼지를 치는 것 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큰 죄를 더하면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작은 아들입니다.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지요.

 그런데 여전히 완전히

뉘우친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는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청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종이 품팔이꾼이 되겠다는

말은 쏙 빼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런 아들이어도 그 아버지는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너그러움은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종종

큰아들의 모습을 취합니다.

 무조건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공평하다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큰 아들의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무조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모자라면 모자란

그 자체로 아껴주고

 사랑할 때 관계의

잎사귀는 넓어진다.

(칼 융)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어디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부산에서 서울까지

과속 운전을 한 차량이

 규정 속도를 철저하게 지킨

 차량보다 얼마나 빨리

도착하는지를 실험했습니다.

즉, 한 차는 규정 속도를

절대 넘지 않는 정속 운전을 했고,

다른 차는 최고 시속 160Km를

넘는 속도로 질주했습니다.

그런데 도착 시간의 차이는

불과 31분이었습니다.
(이 31분을 위해 생명의

위협이 되는 운전을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과속 운전할 때의

피로감은 밤샘 작업을 했을 때의

 피로감과 같다고 합니다.

 여기에 속도위반으로 인해

 내야 할 벌금까지 계산한다면,

31분을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하는 것이 됩니다.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일치.... 모두가

눈에 명확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를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면 분명히 삶 안에서

큰 행복을 갖게 됩니다.

(동백꽃이 벌써 활짝 피었네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