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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은 참으로 나약합니다.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5 조회수1,385 추천수0 반대(0) 신고

 

 

인간은 참으로 나약합니다. 저는 오늘 또 넘어졌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자존심 중에서 절대 구기고 싶지 않은 최후의 보루 같은 자존심을 누구나 하나는 가지고 있을 겁니다. 오늘 저는 그 자손심이 구겨져서 약간 그 상한 감정을 노출했습니다. 그 대상은 제 본당 성당 교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공과 사는 구분을 해야 됩니다.

 

꾸리아 일을 하면서 공적으로 교우를 만나다 보면 때로는 공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사적으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래 사람이라는 인간관계는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에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 서로 상호간에 문제가 일어날 소지가 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할 일만 하고 남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종교를 떠나서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고 어떤 공동체이든지 조직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잘 살아가려면 항상 신중하게 생각하며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겠지만 인간 사이에 적절한 유머 같은 것도 필요하고 때로는 실없는 소리 같지만 즐겁게 서로 웃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농담도 하며 지내기도 합니다. 이건 분명 인간 관계에서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어서 바로 복음에서 말하는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의 원칙은 무엇인가요? 바로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자신의 감정이 소중한 것만큼 남의 감정도 존중해야만이 이 황금률의 원칙을 따를 수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남에게도 자신이 그에 맞게 대접을 해야 하는 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의 대원칙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 황금률의 원칙을 어겨도 어떤 경우는 이게 어겼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어긴 사람이 잘 모른다면 왜 잘 모를까요? 그건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게 남에게 상처가 될 수가 있는 거라는 걸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잘 봐야 할 겁니다. 이건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법전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평생 만약 성경만 보고도 신앙생활을 잘 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를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은 어쩌면 세상 법으로 비유하자면 아마 저는 헌법에 비유를 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헌법만으로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인간사의 규범을 모두 헌법으로 통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위 법으로 그걸 메꾸어 보충을 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의 이런 하위 규범 같은 게 뭐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영성서적이라든지 인간 세상에서 오랫동안 인정한 고전이라든지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인문학적인 지식도 음식의 고명처럼 곁들여져 있어야 자신의 신앙생활 과정에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지식이 왜 있어야 하는지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 말씀을 누구나가 읽어도 그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때로는 영적으로 아주 발달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똑같은 텍스트를 읽었을 때 같은 조건이라면 굳이 인문학적인 소양이 아니더라도 인문사회 같은 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없었을 때랑 비교했을 때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단순한 기도생활과 전례 등 또한 교회 내에서의 봉사도 중요하지만 그런 활동 이전에 더 근본적인 게 선행되지 않은 신앙생활은 모래성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는 강론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론 뿐만 아니라 교부들의 글에서도 그런 가르침을 주는 것을 봤습니다. 바로 성경이 증명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타에서도 이걸 이야기하시지 않습니까? 마르타와 같은 신앙은 겉으로 보기엔 열심히 하는 신앙인으로 비추어질 수는 있겠지만 정작 결과물은 자신의 행위로만 귀결되는 경우가 많지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저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꼭 영성서적이나 세상의 책만이 신앙생활에서 유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분명 자신의 영성 생활을 좀 더 발전시키는 데 일조를 하는 건 분명하지만 이런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저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생각과 사색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묵상이겠지요. 저는 일단 신앙의 틀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사색을 해야 하는지 또 사색을 하지 않으면 어떨지를 많이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색 없이 만약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은 발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종 후에 느낀 거지만 굳이 개신교와 비교를 하지 않겠습니다. 천주교 신앙은 사자 새끼가 생존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시스템 자체가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신앙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자생력이 강해야만이 저는 생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렇게 해서 생존한 신앙인은 정말 강한 신앙인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생존하는 입장이라면 이건 정말 어쩌면 심각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심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만약 한다면 저는 인간적으로 봤을 때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는 거라고 봅니다. 불행해서 불행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신앙 성장이 거의 제자리 걸음 수준이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그런 판단을 하는 겁니다.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앙생활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잖습니까? 나름 누구나가 잘 해보려고 자신의 위치에서 다 노력을 할 겁니다. 어쩌면 신앙을 가지지 않았으면 그냥 방종 같은 생활을 하며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은 최소한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누구나가 하게 될 겁니다. 이런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도 자신의 신앙이 영세를 받은 초보 신앙생활 때나 비교해봤을 때 영적으로 발전을 하지 않게 된다면 저는 그런 신앙인은 불쌍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뭐 대단한 신앙인은 아닙니다.

 

저도 그런 불쌍한 신앙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잘 모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 갔을 때 자신이 몇 년 동안 하느님을 믿었는지 하는 그런 계급장이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자신의 삶이 하느님의 삶 중심으로 변화가 되었는지가 중요할 겁니다.

 

이건 지식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영적인 지식이 있으면 뭐 하겠습니까? 그대로 살지 못하면 그건 죽은 지식입니다. 결국 영적인 지식을 쌓는 이유는 그런 영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정상 궤도를 달려야 되는데 만약 그러지를 못하고 탈선을 한다든지 그럴 때를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기에 그런 이성을 바탕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해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써의 역할을 하는 거라고 저는 보여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적인 지식을 얻으려고 공부를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신앙생활을 하며 성당을 다녀도 이런 부분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누구나가 하는 신앙생활의 기본만 한다면 결단코 아무리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불교에서 말하는 도로아미타불이 될 겁니다. 저는 오늘 제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제 자신이 참 부끄럽습니다. 천주교에서 신앙생활을 한 지 이제 거의 8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리고 개종 전 신앙생활을 한 것과 여러 가지 엄청 많은 정신 세계에 관한 책을 무수히 읽었어도 오늘과 같은 그런 감정 조절도 하지 못하는 수준이라 참으로 지금까지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는 하지만 참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긴 한 것인지 참으로 참담합니다.

 

그래도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이 수준을 능가하는 자녀로 성장하기를 희망하며 또 반성하며 이 길을 달려보려고 합니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성인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성인도 수많은 인간적인 결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정말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단점을 극복했기에 결국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예전에 김웅렬 신부님 카페에서 활동을 할 때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댓글 두 개가 있습니다. 아이디 하나는 기억합니다. 강릉바다라도 하는 자매님입니다. 또 한 자매님이 계셨는데 그분의 아이디는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한날 강릉바다라는 아이디를 가진 자매님께서 올려주신 댓글이 바로 이렇습니다. 형제님, 형제님 글은 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습니다 그리고 한 자매님의 댓글은 형제님 같은 분은 언젠가는 성인이 될 것 같습니다 라는 댓글은 제가 잊어버릴 수 없는 댓글입니다. 그 자매님이 저한테 정말 극찬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사실 왜 저에게 그런 극찬을 해 주셨는지 정말 잘 모릅니다. 그동안 카페에서 올린 글만 가지고 그런 판단을 했을 건데 사람은 글과 자신의 삶이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 왜 이런 생각이 나느냐면요 그때 그 자매님께서 하신 극찬에 참으로 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인은 못되더라도 그래도 경건한 신앙인은 되었으면 좋겠는데 언제 그런 수준의 신앙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저의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한번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시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은 비록 허물이 많지만 자신의 허물이 무엇이라는 걸 알면 언젠가는 그 허물을 끝내는 고치려고 노력을 할 수가 있기에 남에게 밝히기 부끄러운 허물이지만 남에게 이런 저의 허물을 밝히어서 제 자신을 좀 더 잘 알게 되면 그 허물을 고칠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공개하는 면도 있고 또 어쩌면 저의 이런 단면을 통해서 이 글을 읽는 분도 만약 이런 부분을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저의 이런 경험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공개를 해드리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중간에 저의 생각을 적은 단상은 어디까지나 제 자신에게 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형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제 생각을 말씀드렸지만 글로써 제 생각을 표현하려다 보니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이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남에게 신앙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말할 정도의 그런 고매한 인품의 사람이 아닙니다. 살면서 실수투성이로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럼 오늘 제가 실수한 분에게 드린 문자가 있습니다. 이 문자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 용서하시옵소서. 제가 신앙심이 제대로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신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상황이라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똑같이는 못하더라도 흉내라도 내는 시늉으로 속으로 달게 참아 보속하는 심정으로 인내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송구합니다. 아까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저는 원래 제가 남에게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은 순간 했지만 그 잘못에 대해 죄책감은 오래 갑니다. 아무튼 오늘 같은 실수는 다시는 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 번 더 죄송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온 답장입니다. 우리 다같이 항상 예수님과 같이 삽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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