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구원은 집행유예가 아니라 사면 (루가 13;6-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28 조회수1,615 추천수0 반대(0) 신고

 

 다해사순3주일  복음중에서~~~

구원은 집행유예가 아니라 사면

(루가 13;6-9)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법률용어 중에 집행유예라는 것이 있습니다. 판사가 피고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서 일정한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보류하며 그 기간을 아무런 사고 없이 성실하게 무사히 넘기면 선고의 효력이 없어지게 하는 것을 말해요. 만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가 그 기간 동안에 또 다른 죄를 짓거나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했을 때에는 그 즉시 유예되었던 형이 집행이 됩니다.

많은 분들이 성도의 신분을 집행유예의 상태 그 정도로 생각하고 계신듯해요.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일단 형의 집행은 유예시켜주셨지만 그 집행유예 기간 동안에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집행유예는 무효가 되고 형이 집행될 수 있다. 구원은 중도에 취소될 수도 있다라는 식의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아주 편만하게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비유도 마치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곧 찍어버려야 할 무화과나무에 대한 형의 집행을 일 년간 뒤로 미루어주신 사건 정도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만일 그 집행유예의 기간 동안에 열심히 노력해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도끼에 의해 찍히는 참혹한 형의 집행이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협박용 비유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는 때로 그런 짐을 지워주신 하느님을 원망도 하면서 꾸역꾸역 열심있는 종교행위와 억지스러운 선한 일을 만들어 내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하기 싫은거 억지로 하려니까 그것이 친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미워지죠. 그건 하느님과의 화해가 아닙니다. 그건 하느님을 살해하는 행위인 거예요.

 

혹시 톰 행크스가 주연한 그린마일이란 영화를 보셨나요. 그린마일 이라는건 사형수들이 갇혀 있는 그 감옥에서부터 사형집행 장소까지의 그 초록색 바닥을 그린마일이라 그래요. 사형수가 일단 그 초록색 바닥에 발을 딱 딛게 되면 한걸음 한 걸음이 전부 다 죽음의 발걸음이 되는 거예요. 걸어가는 만큼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입니다. 그린마일 위의 걸음은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전부 그 그린마일 위를 한발한발 걷고 있는 거예요. 쉬운 말로 매일매일 죽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매일매일 사는게 아니라 매일매일 죽고 있는 거예요. 이제 그 그린마일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떼는 순간 모든 인간은 다 영원한 사망이라는 형 집행을 당하게 돼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모든 인간들이 처한 상태는 집행유예가 아니라 형 집행 장소로 한발한발 가고 있는 상태에요. 그런데 그렇게 간수들에게 붙들려서 형 집행 장소로 향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사면령을 가진 특사가 찾아와서 너 너 사면! 나가라고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그린마일 위를 한발한발 걷고 있어요. 조금만 있으면 이제 형 집행 장소 전기의자가 놓여 있는 형 집행 장소로 들어가야 돼요. 그런데 갑자기 사면령을 갖고 있는 특사가 와서 너 너 나가라고 포승을 풀어줬어요.

실제로 도스트예프스키가 그런 경험을 했었죠. 그래서 그 이후로 그가 회심을 하고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이런 작품들을 쓴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리에서 풀려난 분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풀려나서 그렇게 풀어준 분에게 또 다른 뭔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걸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합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참혹한 비극에 관한 이야기 뒤에 붙여져 있는 비유에요. 예루살렘 성전에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러 왔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던 그들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어요.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그 일로 제단 위에 그 제물에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의 피가 섞여 버렸어요. 생각해 보세요. 예배를 드리던 사람이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진 조명에 맞아서 죽었어요. 여기서 누가 하나. 지금.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이 많은 사람 중에 왜 그 사람이 그걸 맞았을까? 혹시 그 사람이 우리보다 더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 안 하시겠습니까? 바로 그 질문을 갖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거예요. 그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죄를 그렇게 더 많이 지었길래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서 그렇게 죽은 걸까요.

루가복음 131절 보세요.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여기에서 그때란 루가복음 1256절에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라는 예수님의 일갈이 떨어진 바로 그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은 당신께서 오신 이유가 이 세상에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랬어요.

불을 던지러 온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불이 떨어지면... 구약의 진술대로 어떤 이에게는 심판의 불이 될 거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불이 될 터인데 왜 사람들은 그 하늘의 심판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천지의 기상으로 일켜지는 일상에만 관심을 두고 있느냐라고 안타까워하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마치 펌프의 마중물. 마중물 아시죠? 펌프는 그냥 두면 마르잖아요. 그때 마중물을 위에 넣고 막 이렇게 눌러야 물이 올라오잖아요. 그런 펌프의 마중물처럼 이 세상 불심판의 마중불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러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분이 먼저 십자가에서 심판의 불을 맞아 활활 타버리신 거예요. 그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고는 그 불에 의해 세상에 불이 확 질러진 것입니다. 심판의 불. 이 세상은 지금 불붙어 있는 거예요. 심판의 불이 붙어 있는 거라니깐요.

그렇게 이 세상에 불을 붙이신 예수님께서 루가복음 12장 마지막에선 이런 말씀을 하세요.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천지의 기상이나 관심을 가지면서 일상에 착념하여 살 때가 아니라 너를 고소하러 오는 그 고소자와 화해하는데 신경을 써야할 때라는 거예요. 그린마일 위를 걸어가면서 '야 이 땅이 왜 이렇게 울퉁불퉁해. 아니 왜 옷이 이 모양이야. 아니 먹는 밥이 왜 이 모양이야.' 그럴 수 있느냐는 거예요. 심판의 불을 던지러 온 자가 여기 있는데 그 자를 보면서 지금 너희들이 뭘 하고 있냐는 거예요. 나는 지금 너희를 고소하러 왔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고소할 때에 나와 화해하지 않는 자들은 전부 사망에 떨어져 죽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와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고 너희들이 엉뚱한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고소하는 이는 호리의 선처도 없는 분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호리라는건 로마시대 가장 작은 동전입니다. 호리. 그러니까 요만큼도 안 봐준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분과 그 고소자와 화해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다 죽는다는 거예요. ? 요만큼에 빚은 다 있으니까! 고소자가 원하는 데로 완벽하게 고소자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다 죽는게 이 세상의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너희가 유일하게 살 길은 고소자와 화해하는 것 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고소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예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 사건이에요. 루가복음 13장으로 이렇게 넘어오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을 아주 경멸했어요. ? 거기는 이방 땅과 접경 지역이었고 가난한 동내였거든요.

그래서 나타나엘이 '야 갈릴리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게 나오겠느냐' 이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예요.

성경에는 루가복음 13장 서두에서 그 갈릴리 사람들과 그들을 경멸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공히 등장시켜요. ? 경멸 받는 자나 경멸하는 자들이나 회개 안 하면 다 죽는데... 이걸 우리에게 각인시켜 주기 위해 두 종류의 사람을 등장시키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두 지역 사람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을 이야기의 주제로 뽑아 올려요.

갈리리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다가 이방인의 칼에 맞아 죽었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히스기야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 기혼샘에서 끌어다가 만든 그 실로암 못 가에서 그걸 지키는게 실로암 망대거든요. 수로공사를 하다가 깔려 죽었어요. 망대에 깔려 죽었어요. 둘 다 이 방인 괴수의 그 맏형인 빌라도가 관여한 사건이에요.

주님은 그들의 죽음의 본질이 죄의 경중이나 가볍고 무거움이나 다소. 많고 적음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힘주어 강조하세요. 죄가 아무리 많은 사람이나 아주 적은 사람이나 무거운 죄를 진 사람이나 작은 죄를 진 사람이나 죄인은 죄인이다라는 거예요.

 

 

내가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섰어요. 그러면 나는 살인자에요. 그런데 '아니요 나는 사기는 안 쳤고요, 착한 일 많이 했고요, 구제도 많이 했고요... 이거 하나도 쓸모없어요. 그냥 그 죄의 한 가지로 그냥 살인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짓는 모든 죄는 다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에요.

그러니까 죄가 아무리 많으나 적으나 무거운 죄나 적은 죄나 다 똑같은 거예요. 하느님 앞에서의 죄는. 시편 51편 내가 하느님께만 범죄하였다 그러죠 다윗이요. 죄라는 단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에요. 하마르티아 죄는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관계에서 통용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게 죄에요. !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다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사망에 처해져야 돼요. ? 모든 인간은 다 호리의 죄라도 다 짓거든요. 그런데 그 호리도 용서 안하세요. 하느님은요. 그게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되지 않은 티끌들의 운명이에요.

그럼에도 자기들은 마치 그 지옥의 형벌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비극을 죄와 결부시켜서 '저 사람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저런 어려운 일을 당한 거죠'라고 갑론 을박하는거 자체가 무식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그들에게 大怒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135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너희들도 똑같은 운명이라는 거예요. 너희들도 똑같이 지금 그린마일 위를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뭐가 잘나서 지금 살려두는 거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은 12장 말미에서 호리(毫釐 극히 적은 분량 비유적으로 이르는 )의 죄라도 있는 자들은 절대 감옥에서 못 나온다고 말씀하시면서 고소자와 화해하라고 하셨죠. 그리고는 곧이어 회개하라로 이어가시는 거라 말이에요. 그러니까 고소자와의 화해가 뭐라는 거예요? 회개라는 거예요. 회개 착한 일 많이 하고 종교행위 열심히 하고 하는게 아니라 회개란 말이에요. 고소자와의 화해가... 그래서 12장 말미에 이게 붙어 있는 거예요. 성경은 원래 장절 구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하게 만드시는 거죠? 그러니까 두 아들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공부하면서 배웠잖아요. 회개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는 거예요. 로마서 24절 보세요 4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가 회개케 하세요? 하느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의 자리로 끌고 가는 거예요. 회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어요? 하느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천지의 기상을 분변하여 일상을 예견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에 의해 이미 불이 던져졌고, 이 세상은 지금 심판의 불바다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을 하고, 이 불붙은 심판의 세상에서 살아날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길! 밖에 없음을 확실히 붙들어서 그분의 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로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러한 은혜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더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비유를 하나 더 보태시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인 거예요.

 

비유는 아주 이상한 모양으로 시작이 되죠.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어떤 주인이 등장해요. 왜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안 심고 무화과 나무를 심은 걸까요? 예수님이 지금 말이 헛 나온 거예요? 포도원에 포도를 유난히 중요시하는 유대인의 그 포도원에 거기에 딴게 심기면 안돼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포도가 제일 중요한 작물이었거든요. 그들에게 있어서 포도주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런데 거기에 포도가 아닌 다른 것이 심겼다는건 그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해서 주인이 완전히 이제 포기하고 포도를 걷어내 버린 상태에서 다른 열매의 소출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는 포도를 대신한 대체작물이죠. 대체작물이란 이미 앞선 실패를 전제하는 개념이에요. 그래서 대체작물이 들어가는 거니까 ...

그러니까 실패와 무능력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가 심겨있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줄곧 포도와 무화과나무로 비유를 하세요.

호세아서 910절을 보세요. 10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이스라엘은 광야의 포도송이 같았다.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너희 조상들은 첫 절기의 무화과나무 맏물 같았다. 그러나 바알 프오르에 이르자 그들은 우상에 몸을 바쳐 저희가 사랑하던 것처럼 혐오스럽게 되어 버렸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뜨거운 광야에서 만나는 싱그러운 포도로 여겼고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열매를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게 보아주셨다는 거예요. 포도와 무화과나무 열매로 봐주셨다는 거예요.

근데 그 포도와 무화과나무 열매가 하느님을 배반하고 우상에게 몸을 드려서 우상과 같이 가증해졌다 그래요 그게 바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나 (귀한 거죠)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나라는 우상을 섬기게 된 타락한 자들의 모습을 말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끝없는 자기애의 욕망이 얼마나 집요하고 더러운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인 거예요.

포도원 나무도 꽝이고 무화과나무도 꽝이다. 그 상태에서 너희들이 기대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이거 가르쳐 주기 위한 거예요. '나는 너희를 포도로 무화과나무 열매로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 너희들에게 해줄거 다 해줬다.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구나.'

 

이사야서 51절 이하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1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하느님께서 기름진 포도원에다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시고 망대까지 세워서 최적에 환경을 만들어 주었어요. 어디에요? 에덴입니다. 거기가. 그런데 그 극상품 포도나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들포도를 맺어 버렸어요. '나도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 이게 들포도에요. 하느님은 이걸 지금 무너뜨리러 오신 거예요.

이걸 이사야서 54절을 보면 4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하느님께서 탄식을 하는데 내가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이야기하세요. '내가 뭘 부족하게 해줬니 한번 있으면 얘기해봐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담아 에덴에 너에게 부족한게 뭐가 있었니? 그냥 내 말만 들어라라는 그 말만 지키면 되는데 그리고 딴거 다 줬잖아 뭘 더 줬어야 되니' 그 이야기 반복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겨우 들포도를 맺어?.... 이게 바로 하느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티끌들의 실체인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되지 않으면 모든 존재는 그런 티끌 같은 삶을 사는 거예요. 내가 주인인 것처럼. 하느님은 지금 구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낱낱이 폭로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게 인제 이스라엘이라는 큰 단위로 또 설명이 되죠.

 

시편 809-10절 보세요. 9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10 당신께서 자리를 마련하시니 뿌리를 내려 땅을 채웠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나라 누구? 이스라엘. 그런데 주님은 그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하시죠. 그 포도나무를 어디다 심었어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심었더니 어떻게 되었어요? 계속 들포도만 맺었어요. 판관기 내내... 보세요. 구약은 전부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할거 다 해주세요. 그런데 인간은 계속 실패만 해요.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불가능함 속에서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돼요? 하느님의 은혜의 덮으심이 있어야 돼요. 고치지도 못해요. 그냥 덮어 버려야 돼요. 그게 노아 홍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셈의 덮어줌이에요. 벌거벗은 아버지 노아를 그냥 덮어 버리는거 그가 뭘 했다고 축복을 받아요? 그게 바로 복이다를 설명하는 거에요. 그냥 덮어 버리는 거예요.

'어 뻘거벗었네' 이게 율법이에요 나의 선악구조로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어 뻘거벗었네' 누가 그걸 벗었다 그러니? 누가 그걸 벗었다 그래. ? 니 맘대로 그걸 판단해? 저주받은 거예요. 함이에요.

 

본문 7절을 보시면 주인이 무화과나무 열매를 3년간 기다렸다란 대목이 나와요.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실 이 말씀을 레위기 19장의 율법에서 인용하여 쓰신 말씀이에요.

레위기 1923절 보세요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온갖 과일나무를 심을 경우, 그 과일들을 할례 받지 않은 포피로 여겨야 한다. 세 해 동안 그것들은 할례 받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과일들을 먹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지금 요걸 끌어다 쓰시는 거거든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과목을 심게 되었을 때에 3년 동안 열리는 과실은 절대 먹으면 안 되었어요. 못 먹는 거예요. 왜냐면 3년 미만의 과실은 할례받지 못한 것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먹지 말라는 거예요. 못 먹는 과일이어서 가 아니라, '요건 할례받지 못한 것이니까 부정한 것이야 고건 먹으면 안되지' 요거 가르쳐 주기 위해서 못 먹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3년 미만의 과실은 다 뭐다? 할례받지 못한 것 부정한 것 못 먹는 것 이란 뜻이에요. 못 먹는 것.

그렇다면 3년이 지난 과수에서 열린 과실은 먹어도 된다는 이야긴데 그 과실들을 먹을 수 있는 근거가 뭐겠어요? 3년 뒤에는 다른 과실이 열리나요? 똑같은 과실이 열려요. 같은 나무에서는 같은 과실만 열립니다. 그런데 3년 뒤에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근거가 뭐예요? 3년 뒤에는 그 과실나무가 할례받은 나무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할례라는게 뭡니까? 나무가 애를 써서 받아낼 수 있는 거예요? 나 할례 주세요. 나무가 쫓아다녀요?

 

할례라는거 자체가 그 당사자의 쪼개짐 대신에 어떤 다른 존재의 쪼개짐이 일어나고 그 다른 존재의 대신 쪼개짐이 그 당사자에게 전가가 되는 언약의 징표에요. 그래서 할례라는 단어도 쪼개짐이지만 언약이라는 단어도 쪼개짐이에요. 똑같은 단어에요. 언약의 징표에요. 실제로 내 삶에 일어난게 아니라 어떤 사실이 일어나서 나에게 전가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할례의 언약입니다.

따라서 가나안에서의 과실나무가 3년이 지난 뒤에 먹을 수 있는 과실을 맺게 되는건 그 과실나무의 수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애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과실에게 은혜를 베푼 어떤 존재의 배려 때문이란 말입니다. 나무는 그냥 계속 그 나무에요. 그런데 3년 미만 때에는 할례받지 않은 걸로 여겨버리시고 그 후에는 할례받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일 뿐이에요. 열매는 똑같애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이나 예수 믿은 후나 열매는 똑같잖아요. 더 썩은 것일 수도 있고... 그런데 하느님이 여겨주시는 거라 말입니다. '너는 할례받은 자야'라고 그냥 여겨주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할례 사건이잖아요.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은 다음에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그랬죠. 루가복음 12장에 보면은 '나 불 던지러 왔다' 그래놓고 '나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어' 그러죠. 그러니까 불을 던지는게 뭐예요? 예수님의 세례 그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쪼개지는 거예요. 심판을 받아 버리는 거예요.

불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불을 먼저 맞아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가 매달려 쪼개져야 할 십자가 위에서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쪼개져버린 거예요. 창세기 15장의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느님 혼자 지나가셨던 그 언약이 성취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쪼개짐이 우리에게 전가가 되어서 2천 년 전에 이미 미래의 우리에게 집행될 사형이라는 형이 집행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집행유예의 인생이 아니라 이미 형이 집행이 되어버린 무죄의 상태가 된 거예요. 무죄!

그린마일이란 영화에 보면은 악독한 교도관이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한 인디언의 시체를 막 모독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 파시라는 놈. 지금도 얼굴이 생각나요. 아주 그때 선한 교도관이 그를 밀치면서 이런 말을 해요. '이 사람은 이미 전기의자에서 자기의 죗값을 다 치른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이다. 더 이상 이 시체를 모독하지 마라' 이는 이미 전기의자에서 죗값을 치른 사람이다. 순결한 사람이니까 모독하지 마라 이야기해요. 그겁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2천 년 전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그 형이 집행이 되어 버렸어요. 우리가 그 전기의자 위에 십자가 위에 이미 앉아 버린 거예요. 거기에 매달려 버린 거예요. 그리고는 자유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쪼개져 버린 거예요. 하느님은 예수님께서 그 가슴에 품으신 당신의 백성들이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함께 형벌을 받은 것으로 여겨주는 거예요. 그게 할례에요 할례!

 

그러니까 이 무화과나무가 3년 뒤에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건 누구의 노력 때문이에요? 무화과나무 때문인가요? 할례 때문이라 그랬잖아요. 그러면 지금 혹시 이 무화과나무가 이제 열매를 맺게 되면 그건 누구 때문이에요? 그를 막아선 과원지기 때문이에요. '죽이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찍지 마세요. 제가 열매 맺게 할게요' 과원지기가 그러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찍지 마세요. 일 년만 시간을 더 주세요 그래요. 본문 8절을 보세요.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제가 뚜들겨 패서라도 열매 맺게 할게요. 내가 둘레를 파고 거름도 주고 다 할 테니까 일 년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할게요. 라고 중보자가 막아서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인 거예요.

무화과나무는 할례받지 못한 부정한 나무이기 때문에 찍어 버려도 괜찮아요. 그런데 과원지기가 그 포도원 주인의 앞을 막아서죠. 드디어 과원지기의 수고가 이 나무에게 가입이 되는 거예요. 드디어 나무가 과원지기의 수고에 의해서 이제 할례받은 나무가 될 것이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할례받은 나무가 맺는 것은 그 모양과 내용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주인이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되는 거예요.

 

이 비유의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단 말입니다. 특히 모세오경은 외우고 있었던 사람들이니까 금방 알아들었을거 아니에요. 여기에서 거름 코프리아는 죽음이 함의된 단어에요. 거름이라는거 자체가 자기의 죽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그게 거름이죠. 죽음 안에 부활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것 예수의 십자가 그게 거름입니다. 코프리아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셔서 거름으로 심겨진 거예요. 그 거름이라는 단어 앞에 그대로 두소서라는 어구가 나오죠. 그대로 두소서 찍지 마세요. 그대로 두세요. 제가 거름이 될게요. 그 그대로 두소서란 단어가 '아피에미'이란 단언데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한군데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이 단어가 그대로 쓰였어요. 그대로 두소서.

루가복음 2334절 보세요.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여기서 '용서하여 주옵소서가' 아피에미이에요. 성경 무섭죠? 그 단어는 면제하다 용서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라는 뜻에 단어에요. '면제해 주세요 면제해 주세요'

사면령을 갖고 그린마일 위를 걷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막아서시면서 하느님께 예수님께 부탁하는 거예요. 아피에미 면제해 주세요. 그대로 두세요. 찍지 마세요. 이런 뜻이에요. ? 열매만들께요. 어떻게? 내가 거름이 되어서! 그러니까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게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을 막아서시면서 '제가 그 형량을 다 채울 테니까 저들의 죄를 면제해 주옵소서. 사면해 주옵서서. 호리라도 내가 다 갚겠습니다. 저에게 퍼부으세요. 저에게 불을 지르세요. 저를 찍으세요.'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로 그 단어가 오늘 본문에 그대로 쓰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하느님의 은혜의 십자가에 관한 비유인 거예요. 예수님이 3년간 열매 맺지 못했던 아니 그 후에도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셔서 말라비틀어진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죽어버리신 거예요.

예수님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가 되어서 그게 우리를 살리는 거름이 된 거예요. 그걸 아는 것. 그리고 그걸 믿는 것이 바로 회개다를 설명해 주기 위해서 회개의 이야기를 쭉 하다가 거기에다가 이 비유의 이야기를 딱 붙여놓은 거예요. '이게 회개다 이게 회개야' '불붙은 세상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이거 밖에 없어' 그거 설명해 주는 거예요. 예수만 믿으면 되는 거예요.

 

하느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가셔서 바로 그 은혜의 십자가 복음을 이해시키심으로 스스로가 신이 되어서 나라는 우상을 섬기며 살고 있는 악당들을 하느님의 발아래로 돌이키시는 거예요.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포도나무는 예수님 한분 뿐이세요. 그런데 그 극상품의 포도나무가 스스로 거름화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 예수라는 극상품 포도나무가 스스로 거름화 되어 버리는 거예요.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들포도나무들의 가지를 스스로의 몸에 접붙여 버리는 거예요.

이게 스스로 망가지는 거예요. 이게 거름 되는 거잖아요.

'내가 거름이 될 테니까 들포도나무들아 나를 빨아먹어라' 아닙니까! 그게 로마서 11장에 돌무화과나무 참 무화과나무에 이야기인 거예요.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내가 포도나무니까 너희들은 꼭 나에게만 붙어 있어야 돼'라고 수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54~6.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누구도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 낼 수 없다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자만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도 자신들이 맺는 열매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가 맺는 열매를 거저 전가받아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할례이고 그게 세례인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예수를 발견해야 되는 거예요. 과원지기가 되셔서 찍혀버려야 할 우리를 변호하시면서 '제가 그들을 위해 거름이 될 테니까 그들을 면제해 주소서'라고 우리를 품어 안아 주신 바로 그 예수를 발견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집행유예 기간을 일 년 동안 주셨으니까 그동안에 억지로라도 착한 일 많이 하자 이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바리새인이라니깐요. 우리 삶의 열매를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님은 바로 그 위에 9절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어요.

요한복음 151~2절 보세요.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내가 참 포도나무라 그러죠. 내가 참 포도나무. 그런데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음에도 과실을 맺지 못하는 자는 제해 버린다라고 여기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거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아이로라는 단언데 들어 올리다라는 단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들려 올려졌을 때 쓰던 그 단어거든요. 아이로 그러니까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는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양지바른 곳으로 들어 올려서 과실을 맺게 하시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열매 맺음의 주체가 누구예요?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하느님!

그럼에도 그러한 하느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들이 마치 선하고 착한 열매를 맺어서 세상의 사랑을 받고 신의 사랑을 받아낼 수 있는 존재라고 착각을 하는거 이게 바로 악이라는 거예요. 그게 죄에요. 죄의 본질이에요. 그게 아니 그거 기특한거 아닌가 아니요? 그게 죄에요.

예레미야 221~23절 보세요. 21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 옹골찬 씨앗으로 너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낯선 들포도나무로 변해 버렸느냐? 22 네가 비록 잿물로 네 몸을 씻고 비누를 아무리 많이 쓴다 해도 죄악의 얼룩은 그대로 내 앞에 남아 있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23 네가 어찌 부정하지 않다고, 바알들을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골짜기에서 걸었던 네 길을 살펴보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아라. 너는 가는 길 종잡을 수 없는 경박한 암낙타로구나.

너무 명확하지 않아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참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이방의 악한 포도나무가 됐대요. 그리고 그 밑에 악한 포도나무의 정체가 그려지는게 그게 뭐냐면 그들이 스스로 잿물로 씻고 많은 비누로 막 씻으면서 '나는 더럽지 않아요 더럽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게 악한 포도나무라는 거예요. 고게 들포도열매인 거예요.

자기가 열심히 자기를 씻으면서 '나 깨끗하죠 나 이렇게 깨끗하죠 나 사랑해 주세요' 이게 기특한게 아니라 요게 악한 포도나무라는 거예요. '나는 하느님이 아니면은 절대 존재할 수도 없고 깨끗해 질 수도 없어요'가 바로 피조물의 제자리이고. 많은 오해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화론이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기서 머물면 안돼요. '깨끗이 씻어야지 잿물로 비누로 열심히 씻어야지 다른 종교인들 보기에 쪽팔리지도 않냐? 우리가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착하게 살자' 이게 건강한 설교자의 건강한 외침이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그게 예레미아 221절이라니깐요. 어떡하실거에요? 악한 포도나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악한 가지이고 유대주의 인본주의인 거예요.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앞에서 자신들의 티끌됨과 더러운 죄인됨을 올바로 직시하고 하느님의 은혜만을 구걸해야 산자가 될 수 있는 자들이에요. 그럼에도 잿물과 비누로 스스로 씻으면서 '우리도 이 정도면 괜찬잖아요. 열심히 우리끼리 바벨탑 쌓아 올라가볼테니까 기다리세요' 이게 빌어먹을 성화론인 거예요. 참 포도나무는 '나는 예수라는 진짜 포도나무에 의해서 은혜의 접붙임을 받아서 비로소 산자가 된 사람이야'라는 겸손한 고백을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511~14절 보세요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12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바리사이들이 그 말씀을 듣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아십니까?”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초목은 모두 뽑힐 것이다. 14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이거 누구보고 하신 말이에요? 바리새인들. '깨끗이 살자. 종교행위 열심히 하자. 율법 열심히 지키자. 제사 열심히 지내자. 그러면 하느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거야. 왜 우리는 선민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격이 있고 그런 능력이 있어 하자 하자 하자' 그랬는데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그냥 놔둬라 쟤네는 소경이야 재네들 쫓아가는 자들 전부 같이 빠져 죽을거야' 왜요? '아무리 저렇게 근사하게 보여도 우리 아버지가 심은게 따로 있거든 그거 아닌건 다 뽑아 버릴거다' 라는 뜻이에요. '그거 아닌건 다 뽑아 버릴거야' 이게 어디에 붙어 있는 거예요? 밖에서 들어가는게 내 안의 것에 영향을 못미친다 그 말에 붙어 있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나무들이 전부 자기 땅을 파고 있어. 내가 나를 심었다는 거죠. 그리고 내 공로에 의해 열매도 맺었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예수만 믿으면 돼요. 하느님 나라의 존재양식은 은혜에요. 은혜로 존재하고 은혜로 경륜되며 은혜로 완료가 되어지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는 겨우 집행유예 정도만을 따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집행유예 기간 동안에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열매를 맺어 내지 못하면 다시 형이 집행이 된다고 주장하는 일부 알매니언 주의자들이나 타 종교인들의 억지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완료성에 엄청난 흠집을 내는 악한 주장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완료성을 갖고 있어요. 완료된 겁니다. 완성된 거예요. 그걸 모르니까 가계에 흐르는 저주니 뭐니 헛소리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전함 완료성을 부정하는 거예요. 그거는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남겨두고 없앤 거예요? 모든걸 다 없앤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여러운건 조상탓이 아니에요. 가계에 흘러 내려오는 저주 때문이 아니라,

아담안에서 선악과 따먹은 나 때문이란 말입니다. 왜 조상탓으로 돌리세요 그거를? 왜 엉뚱한 귀신탓 조상탓? 나는 어디간 거예요? 도대체 죄지은 나는 어디간 것입니까? 이게 순 악당들이에요.

무슨 내적 치유? 내적 치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다 치유하고 가셨다는데 또 뭘 치유받아야 돼? 복음을 모르니까 그러는 거예요. 나는 완전한 사면받았다는걸 모르니까... 또 뭔가 치유 받아야 돼. 또 뭔가 저주를 풀어야 돼. 해결해야 돼 뭔가를... 이 시대는 예수 안 믿는 겁니다!

무슨 교회가 예수를 믿어요? 거짓말 하지 말라 그러세요. 예수 안믿습니다. 십자가 안믿어요. 자기 믿는 거예요. 자기의 편한 삶. 그거 추구하는 거예요. 그게 나를 우상삼아 사는 악당들인 거예요.

우리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자들이 아니에요. 더 이상 우리가 노력하여 풀어내야 할 저주도 없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그런 일도 없어요. 우리는 완전 사면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받을 형은 이미 예수가 다 받아 버리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순결하고 고귀한 하늘의 자녀로 이미 완성이 되어 버렸어요.

 

하느님 우편에 앉히셨다. 그래서 밖에 그 어떤 더러운 것도 우리를 더럽게 만들지 못해요! 그럼에도 우리에게 교묘하게 짐을 지우는 사람들이 있죠? 예수를 믿고난 후라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하여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지 않는 사람은 절대 구원얻은 사람일 수가 없으니까 좋은 열매들을 맺어 내라는 거예요. 좋은 소리죠.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배우는 거예요. 그거 먼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열심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열심이어야 되는 거라 말입니다. 그래야 짐이 안되는 거예요. 그 앞의 것은 율법주의 유대주의자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지웟던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 했는지 보세요.

루가복음 1146.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도움도 못준다는 거예요. 그 율법이 율법지킴이 그러면서 짐만 계속 지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지들도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어. 그들을 이끌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아닙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데는 조금도 도움이 안되더라는 거예요. 그 율법이...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목표로 살아서도 안돼요. 세상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이방인인 하느님 나라의백성인 우리가 가는 길을 세상은 못알아 봐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를 좋아해요? 우리가 가는 길을 그들이 못알아 먹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사람들이 나를 그리워해주고 나의 떠남을 아쉬워 해주며 나의 부재를 오래도록 아파해 주는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게 우리의 천국 지옥의 갈림에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순신 장군 맥아더 도산 안창호 그렇게 애틋하게 아직도 그리워 하십니까? 이름은 남아 있는데 그들이 우리들의 영생과 무슨관계가 있어요? 근데 왜 그런 이름을 남길라 그러세요.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이 한 말 '호랑인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누가 한 말인지도 모르면서 왜 사람은 죽어서 꼭 이름을 남겨야 된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세요? 사람은 죽어서 예수의 이름을 남겨야죠. 하느님이 우리의 이름 뺏어가시고 예수의 이름으로 바꿔주는게 신앙생활인데... 내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가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늘 입만 열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고 뭐도 하고 뭐도 하고 하면서 정작 삶은 자기 이름 남기는 데만 착념하고 있으니 이게 뭐가 성도에 삶이에요? 순 거짓말이죠.

 

사람은 죽음 뒤의 삶인 영원을 준비하며 살도록 지어진 존재에요. 영원속에서 나는 천국과 지옥 둘 중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거기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린마일 위에서 하루하루 죽어가던 사람이었어요. 오늘도 우리는 그 죽음을 향해서 한발한발 걸어가는 거예요.

언제 우리가 그린마일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뗄지 몰라요. 거기서 마지막 발거름 딱 떼는 순간 형이 집행되는데, 그때 우리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내놓으시면 돼요. '어 너는 십자가 안에서 이미 형 집행이 되었구나!' '자 너는 순결하고 깨끗한 자가 된거야! 새옷 입고 천국으로 가거라!' 이런 심플한 복음이 어디있어요. 이게 왜 어럽습니까!

그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만큼 우리의 삶이 안 바뀔거 같으세요? 이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닌 자발적인 그리고 기쁘고 행복한 그런 열심과 수고를 안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거를 말씀을 통하여 이걸 배우기 전에 먼저 자기의 평판과 인기를 위해서 신앙생활과 착한 삶까지 이용을 해먹으니 어떻게 그가 고소자인 예수와 화해를 하겠어요! 미워 죽겠지... 하기 싫은거 억지로 해야 되는데... 고소자와 화해하세요. 다른 말로 예수만 믿으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