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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3.3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3-31 조회수1,58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3월 31일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제2독서 2코린 5,17-21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

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자제력이 강한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보다는

 악을 선택하고,

미래의 안녕을 우선시하기보다는

현재의 쾌락을 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자제력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쉬운 선택만 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올바른 행동이 따르는 선택을

하는 데는 많은 걸림돌이

 따르기 때문에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쉬운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신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많지만,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셋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지만 자기 자신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고통과 시련이 따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에 빠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서는

 나약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마라톤 선수들이 41Km에 이르면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합니다.

너무 피곤하고 힘든 상황이어도

 목표에 근접했다는 생각에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내 자신을 제대로 알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제력이 부족한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제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쉬운 선택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간의 만족을 원하는

삶이 아닌, 내게 꼭 필요한 것을

찾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이 작은 아들은 자제력이 부족한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쉬운 선택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달라고 청하지요.

그리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낭비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아버지였습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를 찾아가서

 용서를 청합니다.

 사실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청하는 행동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돌아가신 부모에게

 받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계신 부모에게 유산을

 청하는 것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였기에 그는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달라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결과는 어떠했나요?

큰 죄를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기쁘게 맞이하며 잔치까지 벌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개 숙여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용서를 청하는

우리를 무조건 받아주십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돌아보면

다툼까지도 사랑이었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정현주)

(작은 아들을 받아주시는 아버지)


동네가 아이를 키우던 시절

예전에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동네가 아이를 키웠던 것 같습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아이를

 알고 있어서 지나가면

 잘한 일이 있으면 칭찬도 해주고,

나쁜 일이 있으면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어른을 만나면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분이니까요.
더군다나 아이들끼리도

얼마나 친했습니까?

학교만 끝나면 동네 공터에

모여서 함께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시간이 되면 엄마들이

나와서 “**야~~ 밥 먹어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곤 했습니다.

이 말이 노는 것을 멈추는

시간이 되었고 아이들은

아쉬움 속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은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입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특별한 경계심을

품어야 하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인 나만이 내 아이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점점 아이들이

 밝게 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 사람이 키우는 것과

모두가 키우는 것은 분명히 다르니까요.

그 옛날이 그리워집니다.

(40년전 사진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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