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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사순 제5주일. 2019년 4월 7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05 조회수1,637 추천수2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일. 201947.

요한 8,1-11.

 

오늘 복음 이야기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입니다하느님이 계신다고 유대인들이 믿던 건물입니다예수님이 그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예수님은 갈릴래아 시골 나자렛 출신 젊은이로서 사실은 성전에서 가르칠 수 없는 신분입니다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그들이 예수님 안에 이해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고백하기 위해 각색(脚色)한 이야기입니다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당신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가르치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모세의 법(신명 22,22-24)을 내세워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합니다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십니다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부인, 그들이 어디 있소? 아무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았지요?” 그 여자가 아무도 안했습니다, 주님”,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나도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하느님의 집이라는 성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과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죽입니다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당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이 말씀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우리는 남의 잘못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을 잊어버립니다이 사실을 마태오복음서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태 7,3)고 표현하였습니다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일관성(一貫性)이 없고 단편적(斷片的)이라는 말입니다오늘 복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이웃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요한복음서입니다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70년이 경과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리스도신앙공동체가 그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집필한 복음서들입니다오늘 복음은 유대교는 율법 지킬 것을 강요하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유대교는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신데유대교는 하느님과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 주신 삶의 지침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만 믿으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느님이 벌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제일 먼저 집필된 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왕 함무라비가 집필하게 한 법전입니다. 그 법전이 법의 기본(基本)으로 삼고 잇는 것도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소위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입니다상대가 잘못한 그만큼 앙갚음을 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현대 사회가 제정하는 법들은 함무라비의 것보다는 많이 세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에는 동태복수라는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다만 개인 각자가 잘못한 이에게 복수하는 대신 국가(國家)공권력(公權力)이 잘못한 이를 잘못한 그만큼 벌을 주어 복수하는 것입니다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에 상응하는 벌을 원칙은 예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그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의받아야 한다는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질서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벌을 주고 복수하지 않으십니다하느님은 베풀고용서하고살리는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었다.”(1,4). 그 생명이 보여주는 바를 빛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자비하신 하느님의 빛으로 삶을 비추라는 말씀입니다.요한복음서는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내 말속에 머물러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들입니다그러면 당신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는 당신들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8,32).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는 말씀입니다사람을 단죄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은 인과응보가 요구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악순환(惡循環)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간 사(事)의 질서 따라 삽니다그래서 우리는 재물(財物)을 좋아하회고강자(强者)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弱者) 앞에서는 강합니다나 한 사람 잘되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허세도 부리며, 무자비하기도 합니다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멀리합니다그것은 동물 세계가 지닌 질서(秩序)입니다자기 자신과 자기의 종족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입니다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모세의 깨달음이나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 사는 동물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합니다그것은 자비와 용서의 질서입니다.  하느님은 선한 분이십니다가해자(加害者)가 피해자(被害者)에게 주는 악(),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복수의 악이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악이 순환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유로우십니다. 그 자유를 배워 살라는 초대입니다.

 

오늘 복음의 유대인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릅니다그들은 그분의 집에서 그분의 율법을 빙자하여 그들 안에 있는 악을 실현합니다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잃었습니다그들은 자비와 사랑을 잊으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돌로 치려합니다예수님은 그 여인을 용서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잃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입니다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서, 인류 안에 자리 잡은 악의 순환에서 벗어나고,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우리에게 권합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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