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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4.2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22 조회수2,292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9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

제1독서 사도 2,14.22-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이스라엘인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복음 마태 28,8-15

그때에 8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면서 그 여자들에게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1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12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14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15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감은 언제 생길까요?

 많은 이들은 상대방과

좋아하는 것이 같을 때

생긴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좋아하는 것이 같아지면

금방 헤어지고 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뻔하다’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좋아하는 것이

다를 때 친밀감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 역시도 아닙니다.

 서로 좋아하는 것만 주장하다가

싸움이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친밀감은

 언제 생겨나는 것일까요?
친밀감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이해해 줄 때

생겨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감을

통해 친밀감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이해를 해주니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겠습니까?
어떤 부부가 “우리는 너무 달라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어요.”

라고 말합니다. 좋아하는 것까지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얼굴이 완전히 비슷한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남남이 만나서 한 가정을 이루는데

어떻게 좋아하는 것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싸우고

다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감과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타인의 공감과 지지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먼저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공감하고 지지해줄 때 친밀감이

쌓이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원했던 모습과 다르게 말씀하고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습들, 즉 사랑에

반대되는 모습들을 따르지 않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부활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숨기려고만 노력했고,

헛된 소문을 일으켜서 끝까지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으니 이들 앞에

당신의 부활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향한 공감과 지지는

내 이웃에 대한 공감과 지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고 우리들이 따르기를

간절하게 원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화합과

 일치의 삶이 아닌 분열과 다툼 삶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행동은 상상 그 이상의

미래를 반드시 선물한다.

(기타가와 야스시)

(무덤을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

무지개는 몇 개의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요? 곧바로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치면서

7개의 색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는

무지개가 6개의 색이라고

 말한답니다. 왜냐하면

 파란색과 남색을 같이

쓰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이 두 색깔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색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코발트블루’라는 색깔을

어떤 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파란색의 일종이지만,

짙은 파랑색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이처럼 무지개도 무조건 7가지

색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색에 대해 다양한 표현을

가진 곳에서는 7가지 이상의 색이,

그렇지 못한 곳은 7개 이하의

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 맞습니다. 어쩌면 틀린 것은

‘7개의 색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반대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무지개는 7가지 색이다’

라는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율법만이 진리이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 안의 정신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는 세부조항에만 얽매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틀렸다.”입니다.
틀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주님의 ‘부활’이 아닐까요?

비참한 죽음으로 완전히

끝났다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던

모습도 틀렸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친 것도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틀렸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당시의 부활로

제자리를 찾도록 해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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