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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4.23)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23 조회수1,54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9년 4월 23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제1독서 사도 2,36-41

오순절에,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36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37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8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

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증거를 들어 간곡히 이야기하며,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고 타일렀다.
41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리하여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가량 늘었다.

복음 요한 20,11-18

그때에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쉽게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거의 같은 공통점은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사람들 앞에서

강의했을 때가 떠올려집니다.

어느 본당에서의 견진 특강이었는데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모릅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쿵탕쿵탕 뛰고 다리가 저절로

사시나무 떨 듯이 떨리는 것입니다.
강의 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더욱 더 커져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강의 내용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면

어쩌나... 사람들이 비난하면

어쩌나... 등등 불안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면서 힘들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강의 내용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어떤 심리학자는 “내 불안의

80%는 불안해하는 나라는

존재를 불안해하는데

비롯된다.”라는 말을 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두려움 외에

두려워할 것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내 자신이 두려울 뿐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지금 제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강의 내용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고

이에 집중을 하면 보다 더

올바르게 살 수가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만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미리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 더

군다나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면

 육체의 부패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제 완전히 ‘죽었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불안과 절망 안에서

힘들어 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 무덤을 찾아갔던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죽음 자체에만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정원지기로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지가 한참 되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겠지만,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부활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지 않는 이유가

바로 주님의 시신에만,

 즉 주님의 죽음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에 집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할 때, 우리들 역시

지금 삶 안에서의 모든 걱정과

불안을 극복하고 대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으며 더불어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지혜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자)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부활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행동의 중요성

옛날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연세가 많은 노부부 단 둘이

어느 산골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할아버지께서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시고, 할머니께서는

시냇가에 빨래를 하러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큼지막한 수박 한 덩어리가 둥실둥실

떠내려 오는 것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이 수박을 한 번 보시고는

그냥 무시해버렸습니다. - 끝 -
옛날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고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어떤 의미를 얻을 수가 있으셨습니까?
아마 다들 저를 욕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재미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여기에 적은거야?’

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진리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행동이 없으면 스토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할머니께서

그냥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스토리가 되지 않고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머릿속으로는

기억하고 있고 또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머릿속에만

담겨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스토리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의미도 없어지고 맙니다.

행동이 없으면

그냥 ‘끝’일 분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머릿속에만

담아두지 마십시오.

행동으로 옮겨야지만 나의 스토리,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라는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동이 있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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