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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4.24)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24 조회수1,733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9년 4월 2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제1독서 사도 3,1-10

 

그 무렵 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6 베드로가 말하였다. “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10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복음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화초하고 맞지 않나봐.

그 어떤 화초를 키워도 다 죽네.”

라고 한숨을 쉬면서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정말로

잘 키워보겠다면서

 ‘난’을 구입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난’ 키우기가

제일 어렵다면서 말렸지만,

이 어려운 것을 키우면 자신과

화초와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에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을 정성껏 키웠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또 죽고 말았습니다.

실망하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선인장을 선물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고

햇빛에 노출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력이 강하다는

선인장까지 죽고 만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른 친구들은 이 사람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의 상처를 입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실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웃으면서 말합니다.
“선인장은 죽기도 어렵다는데,

그 어려운 것을 내가 해냈어.

나는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아.”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실망하고 절망하는 쪽이 아닌,

긍정적이고 희망의 방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무엇인가를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에 어떤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작가이며 동시에 의사인

일본의 와다 히데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무언가를 달성하는 사람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실패해도

된다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사흘째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시체가 사흘이

지난 다음에 해체되기

시작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다시 부활을

기대할 수 없는 포기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실망과 절망의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 어리석은 자들아!”라면서

성경 전체에 나타난 당신에

대한 말씀을 계속해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전히 부정적인 마음으로

실망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빵을 나누어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빵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절망 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였지만,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통해

다시 살아나 희망을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면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실망과 절망의 부정적인

마음을 태워버린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불행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렘브란트의 '엠마오의 그리스도')


내 몸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왜 눈을 뒤통수에

위치시키지 않으셨을까요?

또한 귀 역시

뒤를 향해 있지 않습니다.

 코 역시 뒤가 아니라

앞에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자세히 따져보면

뒤쪽이 아니라 앞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관들이

앞을 향합니다.

어쩌면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앞에서 듣고,

눈앞의 공기를 마시라고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내 몸만 묵상을 해보면 지금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과거에 연연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고

또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작가인 데라야마 슈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뒤에는 꿈이 없다.”
뒤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지금에 충실하고

미래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며 사는 것입니다.

(엠마오라고 추정되는 곳)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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