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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저의 신앙에 대한 반성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25 조회수1,718 추천수0 반대(0) 신고

 

 

격언과 속담, 아름다운 명언은 짧은 내용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 속에 지혜라든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 등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신을 아름답게 해 주는 가르침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전 mbc 앵커였던 개신교 목사인 조정민 목사님의 어록 하나를 올려드렸습니다.

 

1년 전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성당 교우님들에게 이 글을 문자나 카톡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렇게 좋은 글 하나 보내고 잊고 있다가 제가 그 글을 묵상 체험방에 개신교 목사님의 글이지만 내용이 좋아서 다시 제가 찾아서 올려드렸습니다. 최근에 이 글로 인한 재미난 체험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이다 보니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저만 노력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어떤 경우는 어떤 분과 성당 일을 하면서 생기는 일로 인한 힘든 부분도 있을 겁니다. 이럴 때 인간적으로는 짜증이 나는 일도 때로는 있는데 그런 생각이 날 때와 일처리를 하는 부분에 있어서 아무래도 세대차이가 많이 나서 조금 갑갑한 부분이 있을 때 조정민 목사의 그 글이 저도 모르게 자꾸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글 내용을 생각하면 그냥 약간 짜증나는 일도 잠시 또 제 마음을 죽이고 순간이지만 마음을 비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최근에 몇 번 했습니다. 그래서 느끼는 일입니다만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 담긴 글이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도 잠시라도 변하게 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물론 잠시이지만 말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런 게 지금은 비록 변화가 되는 모습의 결과가 초라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약 조금씩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젖는다면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게 영적으로 많은 성장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한 성직자의 일반적인 아름다운 말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힘이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은 얼마나 강력한 힘이 있을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마음을 먹어봤습니다. 내일부터는 잘 실천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에 여러 주옥 같은 하느님의 말씀이 많이 있지만 특히 집회서나 잠언 같은 건 어쩌면 일종의 명언집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수첩이나 카드에 하루에 하나씩 적어서 아직은 뚜렷한 윤곽은 없지만 앞으로는 하루에 하나씩 성경 말씀을 암송을 하려고 합니다.

 

사실 개신교 다닐 때는 성경 구절을 장절을 포함해서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암송을 하고 했는데 개종 후에는 어찌 된 일인지 제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사는 자식인지 제 양심에 손을 얹고 자문한다면 어디 가서 제가 가톨릭 신앙을 하는 사람이라고 솔직히 말한다는 게 어쩌면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을 빌리자면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미사만 열심히 봉헌한다면 어쩌면 모래성 위에 나름 자신의 영혼의 집을 짓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말 오늘을 기해서 끊임없이 조금씩이라도 말씀이 살아서 말씀이 영혼을 아예 장악하도록 말씀 공부에 분발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알게 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절 모르고 시주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내용은 다른 뜻도 있지만 또 이런 뜻도 있습니다. 애써 한 일이지만 잘 알아보고 똑똑히 처리하지 못하여 아무 보람도 없이 되는 경우를 말할 때도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기는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나중에 저희가 하느님 앞에 갔을 때 막상 우리의 개개인의 모습에 대해 뚜껑을 열어봤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신앙생활을 해도 시계추처럼 그저 아무 생각 없이는 아니겠지만 성당을 다니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형식적이고 무늬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은 정작 지금의 신앙생활의 영성적인 수준을 스스로 평가를 한다면 그냥 무난하게 잘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정말 속된 표현을 하자면 나중에 하느님 대전에서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뒤통수치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고 보장 못 할 것 같습니다.

 

실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하느님께 혹여 이런 말씀으로 변명을 할 수가 있을까요? 하느님, 왜 그럼 그때 우리가 세상에 살 때 좀 어떤 수단을 사용하셔서라도 우리가 깨우칠 수 있도록 왜 안 해주셨는지요? 하고 이런 변명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요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창세기 처음에 나오듯이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모든 건 자신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고 그런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일어난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하신다면 정말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참으로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쩌면 너무 안일한 생각으로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시고 우리는 인간이라 너무나도 나약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단순히 하느님의 자비로 그냥 뭉뚱그려 생각을 한다면 이 또한  자칫 잘못하면 큰코다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한 자비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설령 아무리 큰 자비를 베풀어주신다고 하여도 저희 입장에서는 그런 자비는 그땐 하느님만의 전권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리 그런 자비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아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 자비를 베푸실지 마실지는 하느님의 영역 안에 있는 일인데 어쩌면 우리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걸 알지만 단순히 아는 것과 당연히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런 당위성’ 이와 같은 생각은 지양해야 하는 게 정말 최소한의 피조물로서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하느님께서 이런 말씀을 만약에 하신다면 어떨까요? “ 너는 세상에 살면서 나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렸느냐?

 

내가 너희에게 나의 마음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 너희가 궁금해 할 모든 비밀과 보화를 성경 속에 다 담아놨는데 그 속에는 너희가 나를 때로는 경외하지 않아서 흘리는 눈물도 있고, 내 뜻을 따라 살지 않고 내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갈 때 나의 마음이 어떤지 그리고 내가 언제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지 나의 희노애락이 다 성경 속에 있는데 그런 나의 마음을 헤아려보려고 얼마나 노력했느냐고 물어보신다고 가정을 해봤을 때 그때 정말 부끄럽지 않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만 저는 제 자신이 참 부끄럽습니다. 지금부터서라도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말씀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많은 반성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드는 생각이 있다면 신부님들의 명 강론 말씀도 중요하지만, 다른 분들의 노력으로 만든 생각과 묵상도 중요하지만 부족한 면이 있어도 자신의 힘으로 성모님처럼 곰곰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그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그런 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항상 이유식만 먹는 신앙밖에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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