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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내 영혼과 물질이 충돌할때)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28 조회수1,659 추천수0 반대(0) 신고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내 영혼과 물질이 충돌할때

찬미예수님

무지하게 반갑습니다.

빨간 글씨가 계속 있어

차가 막혀 포기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2층까지 꽉 찼네요.

늘 하는 말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깜빡

잊어버릴 수 있는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오셨다는 겁니다.

누구 차를 타고 가나,

몇 명이 가나,

가서 어디서 잘 것인가 등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일을 꾸며 여기 오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니라는 것이죠.

하느님이 허락지 않으면

이 성지에 발을

디딜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아멘.

은총의 밤 강론은 적어도

보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이 어린아이 얘기였죠?

한참 준비하고 있는데

신부님께 공개질문 합니다.’하는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공개질문 했으니

이번 은총의 밤에 공개적으로

답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은총의 밤은 유투브로 전 세계로

생중계 되는 것 알고.

저희들도 반드시 보겠습니다.

뭘 질문했을까 궁금하죠?

본인은 가톨릭 실업인회원인데

회사를 운영하니 늘 돈과

물질을 가까이 할 수밖에 없대요.

그런데 가톨릭 신자 사장들이

모여서 얘기할 때 마다

우리 교회에서 얘기하는 물질과

소유에 대한 개념이 뭔가?

소유물에 대한 크리스챤적인 개념과

어떤 확신을 가지고 크리스챤

기업가로서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빛과 소금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소유물에 대한 크리스챤적인 개념을

확실하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포기하면서까지

이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을 준비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질문했던

기업가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영과 육의 부딪침,

속과 성의 부딪침,

물질과 정신의 부딪침,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다 들어본 것이지만 이 답을 저는

네 가지 정도 요약해 보았습니다.

소유물에 대한 크리스챤적인 개념과

확신이 있을 때 세상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옛날 공과책에 보면

천주사랑과 재물사랑은

함께 사는 못 하느니,’가 나와요.

한마디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재물에 대한 사랑은 같은

차원으로 병행할 수 없다는 거죠.

우리는 진정 이 세상 재물의

위치를 어떤 마음으로

소유해야 합니까?

죽을 때까지 물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이 물질에

대한 개념과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다.’라는

방향으로 선용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원칙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분의 물음에 대하여

다시 반대로 네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첫째, ‘내 소유물의 참 주인은 누구냐?’

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의

참다운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신적 있습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경영 밖에 못합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내 생명부터 모든 것에 대한

경영권만 있을 뿐 소유권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있습니다.

교우들과 얘기하다 보면 그 교우가

몸에 밴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분은 정말 신앙인 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은 어떤 분이시냐?

끝까지 자기 것이라는 말을 안 합니다.

하느님의 자식이지요.’

제 몸뚱이가 어다 있어요?

성령이 머무시는 궁전이죠.’

제 돈이 어디 있어요?

제가 잠시 하느님 뜻대로

보관할 뿐이지요.’

다시 말해 양보 대명사,

사랑의 대명사를 쓰는 사람은

저는 삶도 그렇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나의라는 소유대명사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몸, 내 집, 내 재산, 내 자식.

여러분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잘 아실 겁니다.

농사를 지어서 창고 하나가

모자라서 다른 창고 새로 짓고

추수한 것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가득 찬 창고를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이제부터 실컷 놀고 마시고 즐기자.‘

스스로 자축을 합니다.

그때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죠.

어리석은 인간아.

오늘 밤 내가 네 목숨을 걷어간다면

저 창고의 재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너는 어찌 나에게 그렇게 인색하면서도

너 자신에게는 그렇게

관대하게 살아가느냐?‘

영혼이 어찌 자기 것입니까?

자식이 어찌 자기 것입니까?

자식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양대로

잘 키워주는 역할만 할 뿐

절대 소유물이 아닙니다.

머리끝에서 발가락까지

내 것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기업가가 한

질문의 답을 굉장히 명쾌하게

이천 년 전에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또 어리석은 청지기 비유 등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지는 뭐 하는 사람입니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선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없다고

주인의 재산을 자기 것인 것 양

흥청망청 쓰다가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요절이 난다는 어리석은

청지기의 비유가 나옵니다.

또 어떤 청지기는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나중에 쫓겨난 다음 빌붙을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제 마음대로 탕감해주죠.

내가 지금 탕감해 주니까,

나중에 내가 쫓겨나면

나한테 알아서 해.’

주인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내 모든 것의 주인도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관리인이요,

겸손한 경영자일 뿐입니다.

관리인은 주인의 것에 대하여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데레사 성녀는

홀로 하느님만이 족하다.

하느님만 가지면

세상을 갖는 것이다.’하십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세상을 가지면

하느님도 덤으로 따라오는 줄 압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악세서리 하나, 취미 하나,

고상한 종교 하나 갖고 있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자는

세상 것을 다 소유합니다.

우상이 뭡니까?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다 우상 덩어리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느님보다

자식이 윗자리에 있다고 하면,

자식이 우상일 겁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축복을 주는 분은

분명히 하느님인데,

하느님을 자식보다 밑자리에 놓고

어찌 축복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내 소유물은 참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여러분들이

가슴에 새기지 않고

또 어떤 상황에 합리화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또 영원히 우상숭배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홀로 하느님만이 족하다.’

데레사 성녀의 말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겁니다.

두 번째로 영혼의 가치와

재산의 중요성이 부딪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합니까?

하루에도 일 년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부딪칩니다.

쉽게 예를 들어 볼까요?

여러분 주일 미사 때 헌금 낼 때마다

갈등 없으셨습니까?

천 원짜리 냈다가 집어넣고

오천 원짜리 냈다가 집어넣고,

오늘은 만 원을 낼까, 뭘 낼까?

미사 하는 그 거룩한 순간에도

물질과 영혼은 부딪칩니다.

하느님에게 봉헌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들은 질 때가 많습니다.

내 양심은 오늘은 신부님이

사임당 누님 좀 만나게 해 줘.’

말해도 세종대왕만 오십니다.

사람의 영혼이 인간의

소유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재물도 인간의

영혼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재물과 자기 영혼을

바꿀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하더라도

내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권 맞은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통계 나왔다고 그러죠.

복권 때문에 완전히 망해 버립니다.

거지가 되고 바람나서

집안은 풍지박살이 되고,

살인까지 일어났다고 그럽니다.

형제지간에 의가 다 상해버립니다.

그 사람이 맞는 복권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었습니다.

내 영혼과 재물이 부딪칠 때

비록 불편하고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해도 영혼을 살려야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재산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벌어야 된다.’입니다.

부당하게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투기하고 속여 가면서

돈을 벌면 안 됩니다.

어떤 포목상 주인이

자로 천을 잴 때마다 두 손가락

짧은 천을 끊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천을 끊을 때마다

자기 영혼을 떼어서 마귀한테,

돈 통에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정직과 희생과 명예에 의하여

버는 돈만이 하느님이 축복하시는

돈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부당하게 번 돈 가지고

어찌 행복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남을 속여가면서 번 돈으로

해먹는 밥이 살이 되겠습니까,

해 먹는 고기가 피가 되겠습니까?

다른 이 가슴 아프게 하지 않고,

부당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정당하게 땀 흘려 벌어야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질문은

그러면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재물을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소유한다는 것에

만족감을 갖고 죽을 때까지

한 푼도 쓰지 않고 그저 소유만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가 굶어 죽었는데,

그 사람 집을 청소해보니 장판 밑에

오만 원짜리가 깔려있었대요.

모으기만 했지, 감추기만 했지,

아까워서 본인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쓰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완전히 이기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악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리대금, 뇌물,

남을 부패시키는데 들어가는 돈,

남을 망가뜨리는데 쓰는 돈,

이런 것들은 악한 데

사용되는 돈입니다.

부정한 돈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재물은

가난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가 가진 제물을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제적 독립과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가진 재물을 선용해야 합니다.

지금 드린 이야기는 본당에서

평상 시 많이 들었던 얘기지만

정리를 다시 해드렸습니다.

천주 사랑 재물 사랑

함께 사랑 못하느니,’

그렇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지혜롭게 분별 있게 그 재물을

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에,

또 지금 현재 물질과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기도도 잊은 지 오래고

신앙도 잊은 지 오래고,

평화도 잊은 지 오래라고 한다면,

절대로 어리석은 부자나

어리석은 청지기가 되지 말고

늘 겸손한 청지기로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아멘.

201903월 은총의 밤(03/02)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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