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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만나다 (요한 21:1-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04 조회수2,495 추천수0 반대(0) 신고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만나다

(요한 21:1-14)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드디어 요한복음 마지막 장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세번째 나타나신 이야기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번째, 두번째 나타나셨을 때는 평화가 있을지어다. 샬롬이라는 인사와 함께 그 평화가 어떻게 오게 될 것이다를 이러저러한 소재를 들어서 설명을 해주십니다.

첫번째 만남을 통해서는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는 행위를 통해서 평화란 예수 그리스도의 새창조의 사역을 통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시고요. 두번째 만남을 통해서는 믿음이란 보고 경험하고 노력하여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토마처럼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은혜로 수여받음으로 해서 주어지게 됨을 그림으로 보여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이 두번째 만남에서 등장합니다. 둘다 평화가 오게 되는 방법과 경로를 설명하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런데 첫번째 제자들과 만남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해서 제자들을 당신의 사역의 도구로 쓰실 것임을 천명하세요.

저에게 하느님께서 다 선택하시고 예정하시고 하느님의 열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거냐 라고 질문을 하신단말이죠? 어차피 하느님 다하실 것 우리가 뭐하러 전도는 하냐?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죠. 그런데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데 그 도구로 우리를 쓰세요.

우리가 만일 안한다고 하면 하느님께서 또 다른 방법으로 하시겠지만 하느님은 굳이 당신의 백성들을 도구로 쓰세요. 그래서 해야되는 거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안 도와드리면 하느님의 일이 완성이 안된다. 그런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제자들의 능력과 힘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열심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는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계속해서 주지를 시켜주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20: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너희들이 가서 이제 죄사함의 나의 사역을 동참을 할 것인데 너희들이 그 사역을 어떻게 이루게 될 것인지를 내가 보여주겠다. 그러면서 22절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그 일을 이루게 될지가 설명이 되는거에요.

(요한복음 20:22)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성령에 의해서 그 일이 이루어 진다라는 것이죠. 제자들을 보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새창조 사역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숨을 내쉬는 모습을 통하여 암시하는 거에요.

창세기에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그런 모습이란 것이죠. 그 전에는 죽은 흙이었죠.그 전에도 사람은 움직였습니다.

네페쉬였지만 생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의미에서 하느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사람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본주의자들은 헛다리 짚고 있는거에요. 하느님과 관계없는 사람은 사람 아닙니다.

성도들은 그러한 하느님의 새창조 사역에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뿐이에요. 오늘 본문은 이 두 구절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쉬워요.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제자들을 찾아오세요. 혹자들은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돌아간 것을 가리켜서 믿음 없음에 증거로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리로 돌아간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고 했어요.

(마태복음 28:10)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기 전에 당신이 살아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말은 너희들도 갈릴래아로 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26:31-32) 3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갈릴래아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죠. 부활하신 다음에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래아로 갈거라 그랬어요. 거기서 너희들은 만날꺼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여자들아 가서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해라 라고 이야기 했단 말이에요.

그러면 갈릴래아로 얼른 가셔서 제자들을 그리고 끌고 오셔서 거기서 만나든지 하셔야 되는데 그 전에 마르코의 다락방으로 가셔서 제자들을 만나신단 말이에요. 그리고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갈릴래아로 가지 않고 마르코의 다락방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던 걸까요?

첫번째 만남 후 여드레 뒤에도 마르코의 다락방에 있었어요. 토마와 같이요. 왜 안간걸까요? 그건 갈릴래아로 가란 말씀이 특정한 어떤 지역적 장소로서의 회귀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고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가기 전에 두번이나 다른 곳에서 만나는게 성경에 기록되는 거에요. 그래서 당신이 하신 말씀을 번복이나 하시는 것처럼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지 않고 갈릴래아 이전에 제자들을 두번씩이나 만나신 것이고 제자들도 마르코의 다락방에서 미적거리게 그냥 놔두신 거에요. 몰아가지 않으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제자들이나 예수님이 갈릴래아라는 지역적 공간으로 가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메세지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럼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신 그 갈릴래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인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갈릴래아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으로 취급받던 곳이었어요. 그리고 아주 가난한 어부들의 마을이었어요. 멸시 천대 경멸의 대상이었어요. 그렇게 홀대 받던 곳이 갈릴래아라는 곳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15-16)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이 말씀은 마태로가 이사야서를 인용해서예수님의 갈릴래아 사역의 성격을 묘사한 거에요. 보다시피 이사야도 갈릴래아를 이방의 갈릴래아라고 불렀구요. 또 흑암이라고 불렀구요. 사망의 땅 그늘이라고 불렀어요. 갈릴래아는 그렇게 사망과 흑암과 그늘 등을 상징하던 땅이었어요. 그래서 나타나엘이 야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무슨 선하게 나니한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곳에서 삶을 시작하신단 말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시지만 갈릴래아로 가세요. 그리고 거기서 자라세요.

(마태복음2:22-23)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구약에 이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인가요? ‘나자렛 사람이라 칭하기라이 말씀은 물론 나자렛 사람이란 나즈리인이란 뜻도 됩니다. 히브리어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별된 분이란 뜻도 되지만 여기서 23절에 예언자란 단어가 προφητν prophētōn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예언자들이 이 분을 나자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라고 했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 삶의 전체가 나자렛 사람의 삶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이 공히 메시야 예수님의 삶이 어떨 것이다라고 얘기 했습니까? 고난과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는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살것이다라고 얘기 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자렛이란 이름이 여기에 등장을 하는 거라 말이에요. 그렇게 갈릴래아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멸시와 경멸을 당하시던 곳이에요.

(요한복음 7:41, 52)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렇게 갈릴래아는 조롱과 멸시와 경멸의 상징이었던 곳이에요. 오죽하면 대 제사장 아나니아가 사도 바오로를 총독에게 고소할 때에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하고 조소하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을 나자렛 분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4:5) 5 우리는 이 사람이 흑사병 같은 자로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기는 자며 나자렛 분파의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세상에게 이런 평가를 들어야 돼요. 염병이라. 그러니까 전파 속도가 사람이 어떻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사람들의 영향력이 지대한 거에요. 이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착한일 선한일이 전파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세상과 다르다는 거에요. 염병(흑사병)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염병을 어떻게 표현을 하냐면 나자렛 분파 그 어떤 아주 경명과 조소와 멸시와 천대와 엎신여김의 상징인 나자렛 분파 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예수님을 갈릴래아 사람 나자렛 사람, 경멸과 멸시와 천대와 조소와 엎신여김을 받으실 분이라고 예언을 했다라는 거에요.

그렇게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 갈릴래아 사람이 되셔서 평생을 그렇게 사셨고 갈릴래아 사람이 되셔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갈릴래아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십자가를 얘기하는 거에요. 경멸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 연약한 모습  그리고는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그 십자가의 마을, 갈릴래아로 부르시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먼저 갈릴래아로 가겠다라고 하신 말씀이나 너희들을 갈릴래아에서 만나리라 하신 것은 모두 상징적인 말씀들을 함축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징적인 이야기가 진짜 갈릴래아에서 이제 멋진 그림으로 활짝 펼쳐진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에요.

이제 당신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서 세상에 나가서 죄사함의 사역에 동참하게될 그 제자들의 출발점이 예수님과 똑같은 갈릴래아여야 된다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전체가 갈릴래아 나자렛의 삶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업신여김의 삶으로 점철이 될 거라는 거에요.

그것은 결코 그들의 능력이나 지혜나 열심에 의해서 그들의 사역이 진행되지 않을 거란 말을 애초부터 밝히는 거에요. 절대 너희들의 힘으로 되지 않아. 그래서 너희들은 갈릴래아에서 출발해야 되는 거야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갈릴래아의 삶을 사시면서 당신의 우월성이나 잘남을 자랑하거나 증명하시지 않은 것처럼 제자들의 삶 또한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만을 해바리기처럼 바라는 삶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거에요.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반드시 그 갈릴래아의 삶으로 이끄실 것을 수차례 반복하여 말씀하셨어요.

고난에 대해서 십자가의 삶에 대해서 자기 부인의 삶에 대해서 수없이 말씀하셨죠. 그와 같은 것들이 갈릴래아에요.

그것이 갈릴래아의 삶이에요. 우리가 조금전에 읽었던 마태오복음 2632절에 내가 먼저 갈릴레아로 가리라 라는 말씀 속에서 가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προάξω proaxō 라는 단어는 목자가 양을 인도하다, 이끌다, 몰아가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을 직역을 하면 내가 먼저 너희를 갈릴래아로 이끌고 가리라란 뜻입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거야가 아니에요. 그들이 먼저 가서 고기잡고 있었잖아요. 그런 말이 아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들을 갈릴래아로 이끌어 갈거야 목자가 되어서. 왜냐하면 목자이신 그분이 먼저 갈릴래아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이끌어 간다고 하는 거에요. 그 이야기를 진짜 갈릴래아에서 설명해 주는 거에요.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갈릴래아로 내려가서 갈릴리의 삶 십자가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삶으로 사용이 되게 되는데 그 때도 갈릴래아 사람으로 일하게 되요. 자기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여 하는게 아니라 자기는 예수님처럼 완전히 부인이 되고 멸시와 경멸과 조롱과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고 그렇게 나는 쇠하는데 내 안에서 예수가 일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일하셨잖아요.

 

이 땅에서 멸시와 경멸과 조롱과 업신여김의 대상으로 내려가셨는데 하느님은 결국 그의 삶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 버리는 그 삶속에서도 당신의 일을 해내고야 마는 거죠. 그게 갈릴래아의 삶이죠. 우리의 사역 또한 그렇게 이루어져야 되는 거에요. 무슨 대단히 멋진 모습으로 진행되어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바로 그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의 그릇이 완전히 비워지고 예수님의 은혜가 그 비움을 덮는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전에 한번 보았던 그림입니다.

(루가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면 반드시 그물이 찢어지도록 수확을 얻는다, 축복을 받는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본문을 잘 보세요. 11절에 모든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 고기들을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다 버리고 갔다니까요. 오늘 본문과 조금은 다릅니다. 거의 흡사한 그림입니다. 이 에피소드의 결론이 무엇인가요?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을 기필코 지켜 내시는 분으로 다시 게네사렛 호수 갈릴레아 호수로 오신 거에요. 예수님은 자신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신다는 말씀이에요. 그것이 지금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음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거죠.

 

(이사야 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전지 전능한 하느님이세요.그분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쓰인다고 그랬죠.

그러면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 그리고 우리가 맞딱뜨리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선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을 확인하고 확인하면서 내가 지금 체감하는 현실은 이럴지 몰라도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는 거야를 확신으로 붙들어야 되는 거에요. 다 잘되고 있는 거에요. 선으로 달려가고 있다니까요. 병걸린게 선이 될거에요.

그런데 베드로가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에요.

(요한1:40-42)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이렇게 베드로는 요한복음 1장에서 자기 형제 안드레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이에요. 심지어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셨어요.

그런데 그 중간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갈릴레아 호수로 도망가서 또 고기 잡고 있었던 거에요. 그 때 예수님께서 그 배에 올라가신다고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가셔서 밤이 맟도록(밤새도록)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고기를 잡게해 주세요. 그 때 베드로가 고기 많이 잡게 해주셔서 감사하는게 아니라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라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을 통하여 교회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하느님의 나라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공식을 따라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는데 주님 저는 죄인이네요를 경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 두 다리를 잃고도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정말 그렇게 비상식적이고 무공식적인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게 하느님 나라의 은닉성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공식화하여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 천국이 은닉되어서 숨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천국을 사는 그리고 그 자체가 천국인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고지 꼭대기에 드러나지 않는거에요. 자신이 천국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천국은 바실레이안 (βασιλεία basileia) 통치권(basileia: kingdom, sovereignty, royal power)이라 했지요.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 나라가 임했다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속에서 귀신의 삶의 원리, 마귀의 삶의 원리, 이 세상 힘의 원리로 살고자 했던 우리의 실체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공격을 당하면서 우리가 점점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로 하느님을 믿는 자로 바뀌어가는 그 상태를 천국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천국이 이 땅에서는 행복으로 느껴지겠어요? 물론 행복할 꺼에요. 믿음 속에서요. 그러나 현실로 체감되는 그 천국은 고통스러러워요. 말씀에 의해 공격당하는 거라니까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은닉성입니다.

그렇게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 하자 주님이 그에게 약속을 하세요. 나는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반드시 만들어 낼거야. 그러자 그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베드로의 모습이 이어져서 나옵니다.

그물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고기들과 가족들을 다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더라’.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이게 자기 부인이거든요. 나라는 존재의 울타리 안에 나로 쌓아버린 이 세상 힘들이에요. 그것들이요. 그물, 그물에서 잡힌 고기, 소유죠. 가족 관계란 말입니다. 그와 같은 것들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어디론가 떠나는 거에요. 그게 신앙생활인거에요.

그렇게 다시 부름을 받은 베드로가 이제 다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고백을 여러번 하죠. 베드로는 아주 이상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질이 급하기도, 괴팍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다 하면 물로 헤엄쳐서 예수님께 가야되는데 그 거리가 오십간 즉 90미터나 되는 거리를 물에서 수영을 하고 갈려면 옷을 입고 가야 합니까? 아니면 입었던 옷을 벗고 가야 합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 90미터를 벗었던 겉옷을 입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수없이 나는 예수님을 다시는 배반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는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안믿어 주세요.

예수님은 그 베드로의 말에 계속해서 초를 칩니다. 너는 절대 그렇게 못해!!

(마르14:27-31)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28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29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모두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3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1 그러자 베드로가 더욱 힘주어 장담하였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결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다 버려도 나는 그렇지 않겠다고 베드로가 너스레를 떨었어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오늘밤 3번 부인하게 되거야. 그 베드로의 연약함을 폭로시켜버립니다. 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 그런데 니 그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내 앞에서 뭔가를 맹세를 하고 있니 너? 아니다 라는 것을 폭로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과 고기와 가족을 모두 버리고 예수를 좇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안믿어 주십니다. 그 베드로 속에는 모든 인간들의 연약함과 불가능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베드로 안에 우리가 들어 있는 거에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받아주시지 않자 베드로가 다시한번 더 강조하여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결단을 다른 제자들이 따라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죽을 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배반했고 나머지는 다 도망갔습니다. 이 장면과 오늘 본문 2-3절을 비교해 보세요.

(요한21:2-3)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역시 베드로가 대장이 되어서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있죠. 앞의 구절들에서는 베드로가 나는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라고 했을 때 다른 제자들이 그를 쫓아서 똑같은 말을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똑같이 베드로가 주동자가 되어서 고기나 잡으러 가자하니 다른 제자들도 똑같이 그래 고기나 잡으러 가자하고 갔다는 거에요.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완전 반대의 그림이죠. 인간의 연약함이에요. 인간은 인간의 결단이나 열심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없음을 만천하에 폭로하시는 거에요.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이나 불가능함의 현장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요한복음 131끝까지 사랑하셨다에서 그 끝까지의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많이 배신과 도망을 가는, 심지어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자국도 보았던 자들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시게 되면 너희들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볼 생각도 안하고 그냥 먹고 살 걱정에 고기나 잡으러 가는거에요.

그런데 그들을 예수님께서 끝까지 좇아 오시는 거에요. 나는 죽어도 너희를 안놓을 것이다. 나는 죽어도 주님을 안놓을거에요. 이것은 꽝!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어도 나는 너희를 사랑할꺼야에 주님의 끝가지 사랑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세번째 찾아오셨다. 세번이란 것은 성경에 뭐란 뜻인가요? 세번이란 완전하게 끝까지 할 때까지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번째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구원의 주도권이 있다면 지금 우리는 끝나도 끝납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의 주도권을 예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벌거벗은 채로 나무뒤에 숨었을 때 아버지 하느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담아 어딨느냐...하는 그 그림이 또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끝까지 건질거야. 그리고 찾아오셔서 결국 무죄한 짐승으로 그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잖아요. 덮어줌의 은혜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런 존재이지만 나는 그것을 덮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점철됩니다. 아버지가 덮지 않으면 이 순간에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번째 갈릴레아의 기억을 되살려서 베드로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시키기 위해 베드로를 갈릴레아로 보낸 예수님께서 베드로 앞에 또 다른 부끄러운 기억 소생용 소재를 쓰세요 예수님께서요.

그것은 숯불입니다. 요한복음에 숯불이란 단어가 두번 나옵니다.

 

주님은 그 시몬을 숯불 앞으로 부르시죠. 그 숯불이라는 단어는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세번 부인했었던 바로 그 앞에 있던 숯불이었습니다. 숯불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단 두번 나오는 거에요. 사도 요한이 일부러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얼마나 불가능한 자인지를 여러가지 소재를 통하여 완전히 폭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고 숯불이 하필 지금 이시간에 여기 있냔 말입니다. 나는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힘과 열심을 의지했던 첫째 아담 속의 베드로를 갈릴레아라는 지역적 공간과 숯불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서 기어코 그를 갈릴레아 사람으로 끌어 내리고 있는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는 자기의 힘과 결단을 붙들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를 갈릴레아 사람 나즈르인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별된 자로 연약한 자로 하느님의 강함을 받아내야 하는 갈릴레아 사람이어야지 자기 힘을 근거를 나를 돕겠다는 에덴 동산의 그 선악과 따먹은 아담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느님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단 하나도 없어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메세지인거에요.

한마디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자신을 불태워서 예수님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는 자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당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건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물고기와 빵의 이야기 속에서도 숨어있는 메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호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그 숯불위에 물고기와 빵을 올려놓으셨어요.(9)

그 물고기는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가져오신 물고기였어요.

물고기가 이미 숯불위에 놓여 있었고 그 다음 절에서 너희가 잡은 물고기를 한번 가져와봐라 이야기를 하세요. ? 그것을 세라고!! 그것을 먹자고 아닙니다. 그들에게 먹일 물고기는 예수님이 준비하신 거에요. 빵도요.

그러면 이 무대 장치를 살펴보세요. 갈릴레아 호수가에서 빵과 물고기를 갖고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상징하는 제자들을 먹이시는 사건이 어떤 사건입니까? 오병이어 사건이 또 한번 작은 그림으로 재현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준비하신 물고기와 빵이 제자들에게 먹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너희들은 구원받을 것이고 그렇게 나의 열심으로 너희들의 사역은 진행될 것이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숯불 위에 빵과 물고기입니다. 아니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에는 그 빵을 먹여야 하나요?

솔직한 감정에서는 너희가 그래도 빵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 해도 할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거기에 물고기와 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면목없는 제자들이 그걸 덮석 받아 먹는 거에요. 자기의 물고기를 자기의 노력을 보태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 21:9)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그렇죠. 자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 6장에서 찾아보자구요.

(요한 6:1, 11, 35-40) 1 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에 내가 빵이다’ ‘내가 물고기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내가 너희에게 먹혀지는 하늘의 양식으로 오는 것인데 왜 왔냐면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아버지가 선택하여 아들에게 주신 자에게 입을 벌리고 강제로 들어가겠다는 거에요. 뭐가요? 빵과 물고기가 된 예수님자신이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서 그대로 재현이 되고 있는 거에요.

나는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배신하고 아무리 나를 떠난다 할지라도 끝까지 쫓아가서 너희들 속으로 들어갈거야. 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빨리 와서 먹어!!!이게 은혜고 구원이라는 거에요. 요한복음 131절의 끝까지 사랑이 여기에서도 재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들로 부르신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당신의 살과 피를 준비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계세요.

사람을 낚는 어부의 첫번째 조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이해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너희들 꼴을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부활한 나를 두번씩이나 보고도 여전히 물고기를 잡기 위해, 너희들의 생계를 위해 갈릴레아에 그물을 던지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이란 예수님 측에서 베푸시는 끝까지 사랑하심에 의해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낚는 일 또한 그 주도권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살과 피를 베어서 다른 이들에게 먹일 수 없잖아요. 예수의 살과 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먹은 자로서 내가 그걸 갖고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왕에게 음식을 얻어먹은 거지가 저기 가면 음식있는데 그 왕을 가리키는 게 전도라니까요. 그런데 어줍짢게 선교를 간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이미 뭔가를 가졌고 그 가진 것으 나누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천만의 말씀!!!!그건 침략이고 폭력입니다. 나는 이미 가졌다. 나는 너희들보다 비교상대적 우위에 있는 사람이다고 전제로 가게되면 반드시 그 사람들 위에서 내가 군림할려교 합니다.

아닌 것 같지만요.그렇게 되면 나중에 돌아올 때 너희들은 나 갈 때 반드시 울어야 돼!! 나를 반드시 그리워 해야돼! ! 내가 더 많이 갖고 있잖아! 그리고 내가 더 좋은 곳에서 왔거든!!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던 그 행위와 똑같은 의미를 담은 그림을 보여 주시는 거에요.

나의 일은 이렇게 호흡을 불어넣는 새창조 재창조의 사역으로 완성이 될거다. 이 이야기를 물고기와 빵으로 상징이 된 나의 살과 피가 너희들이 복음을 전하게 될 그 대상에게 먹혀짐으로 이 일은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여기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이 하느님 나라에 가면 그 공로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거죠. 그래서 본문 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요한21:5)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얘들아는 파이디아라는 뜻입니다. 파이디아(Παιδία)는 어린 유아(a little child, an infant)입니다. 왜 이런 단어가 어른들에게 쓰였나요? 천국은 어린 아이들 같은 자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 절대 의존적 존재입니다. 그 이야기 입니다. 너희들은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보내심을 받아야 너희들이 너희들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과 열심을 가지고 가서 뭔일 하고자 한다면 큰일 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얘들아, 파이디아 입니다. 그러한 아가들이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너스레를 떨었으니 주님께서 얼마나 한심하겠습니까?

혹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변했구나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떠나면 그 즉시 한번에 무너져 내립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채우고 있을때만 우리는 산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었다 살았다의 경험을 수시로 하는 것입니다. 산자의 삶이 은혜가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이지를 배우라고요.

주님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끝까지 연약하고 불가능한 그들을 당신의 은혜로 완전히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종결과 완료의 은혜를 그들에게 쏟아 부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와같은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8)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 약속 지키러 오신거에요. 다시 올거야. 나는 끝까지 쫓아갈거야. 니들이 지옥가면 나는 지옥도 쫓아갈거야. 그래서 우리는 지옥 못가요. 예수님이 놓으면 그자리가 지옥이에요. 지옥을 자꾸 불타는 유황불, 죽지 않는 구더기 이런것들을 생각하시는데 그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게헨나,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입니다. 그곳은 몰렉신을 섬겼던 곳입니다. 몰렉에게는 사람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종교개혁을 하면서 몰렉을 섬기던 게헨자 지역을 다 파괴하고 거기서 쓰레기 짐승의 똥 창자 껍데기등을 태우는 쓰레기장으로 쓰게 됩니다. 그곳이 힌놈의 골짜기 입니다. 그게 게헨나입니다.

왜 히브리 사람들이 게헨나를 지옥이라는 단어로 쓰냐하면은 바로 거기는 일년 사시사철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쓰레기를 태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쓰레기장에 반드시 있는 것이 구더기 입니다. 그런 것으로 상징적으로 지옥을 표현한 것입니다. 지옥에는 구더기도 있고 불도 있고 굉장히 지저분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관계없이 사는 자의 삶이 그것처럼 고통스럽다라는 것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속에서 죽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유황불을 우리가 경험 못하면 우린 하느님을 떠난 자들의 비참함을 모르는 거에요. 그걸 모르면 왜 내가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니까요. 여기에서 힌놈의 골짜기 게헨나 지옥을 사셔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거기에서 구원해주신 하느님의 은혜가 뼈에 사무치게 감사할 것아니에요. 나중에 지옥에 갔는데 불없다고 당황하지 마세요. 없을수도 있어요. 그런게 아닙니다.

하느님과 관계없는 자들의 삶 그게 얼마나 처절한지 하느님의 백성은 경험한다구요. 세상은 절대 몰라요 그것을요. 하느님 없이도 돈 명예 건강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뭐가 지옥이야. 그런데 성도들은 지옥을 경험합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사는게 훨씬 힘든 거에요. 세상은 지옥에 대해서 눈과 귀가 안열려 있는데 성도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고난이라고 한다구요. 그런데 그것을 복된 고난이라 하는거에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욱더 공고하고 돈독하게 해주는 고난 그게 게헨나에요. 예수님은 늘 이렇게 주님이 함께 동행하시면서 제자들을 지키고 보호할 것이며 그들의 사역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성취해 나가시겠다고 수없이 반복하여 약속하셨어요. 15장에서는 그러한 주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15:4-5)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나를 떠나서는 니들이 뭘해하시는 것입니다. 못한다는 거에요. 들고뛰지 말라는 거에요. 이렇게 구원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의 주권과 주체성이 오늘 본문 속에 속속들이 배어들어가 있는거에요. 우리가 여러차례 반복하여 읽었던 마르코복음 14장을 다시 보면요? 갈릴리는 목자를 쳤을 때 양들이 흩어진 곳입니다.

 

(마르14:27-28) 2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28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즈가랴서 13:7) 7 “칼아, 나의 목자를 거슬러, 내 동료를 거슬러 깨어 일어나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너는 목자를 쳐서 양 떼가 흩어지게 하여라. 나도 손을 돌려 그 새끼들을 치리라.

이 세상이 예수님 목자를 칠건데 목자를 치면 반드시 양들은 흩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양들이 목자가 버젓이 살아 있을 때는 뭔가 목자의 강함을 의지하여 내가 유익을 얻을 거라고 쫓아 다니는데 이 목자가 연약한 존재로 드러나게 되면, 즉 목자가 침을 당하면 반드시 양들은 흩어진다는 거에요. 나쁜 놈들이죠. 목자의 단물만 빨아먹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우리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흩어진 양들을 찾아가는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손을 그 위에 드리우리라그래서 갈릴레아로 그들을 찾아가는 거에요. 예수님이요. 흩어진 그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그 비슷한 구절이 호세아서에서도 나옵니다.

(호세아11:5-7) 5 그러나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 6 그들의 계략 탓으로 칼이 그 성읍들에 들이닥쳐 성문 빗장들을 부수고 삼켜 버리리라. 7 내 백성은 나를 배반하려고만 한다. 그들이 위를 향해 부르짖어도 누구 하나 일으켜 세워 주지 않으리라.

꼭 베드로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칼이 목자를 쳐서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양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8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입니다. 그래도 안놓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나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부인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끝까지의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인간의 결단과 의지를 내세울수 없어요. 결단과 의지를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결단과 의지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결단과 의지가 무익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결단하고 의지하여 어떤 것을 이루었을 때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셨다는 것을 꼭 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하느님의 선택 안에 들어간 하느님의 백성들은요 또다시 그들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과거로부터 계속 단절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도끼가 너희의 뿌리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묵사발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과거로 돌아가서 자기들의 생업의 현장에 돌아가서 그물을 뿌렸는데 고기가 하나도 안잡힌 거에요. 기적입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아 이제 내 유익을 위하여 살거야. 난 싫어!’ 이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고기를 한마리도 안주세요. 못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져라 하십니다. 그랬더니 또 153마리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153마리의 큰 고기가 잡혔다는 것은 셀 수 있는 큰 고기가 잡혔다는 것입니다. 피레미는 안셉니다. 큰 고기 153마리가 잡힌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제자들의 삶은 생업의 현장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아무리 그물를 뿌려도 자기의 재주 힘과 노력으로 자기의 삶과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락을 하셔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 끝!! 고생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일상도 내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면 그 홍해를 헤엄쳐서 다시 못 돌아갑니다. 뒤에서 문을 닫아 버립니다. 과거와는 계속 단절 됩니다.

과거와 단절이 된다는 것은 이 과거가 전제가 되어 내가 되고자 하는 어떤 지점으로 향하는 모든 희망의 활주로가 다 폭격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희망없는 삶을 산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

어떨 때는 정말 화도나고 짜증도 납니다. 그 하느님의 처사가 불편해서 솔직히 화가 날때도 있다구요. 저도 어떨 때는 미칠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에게 진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또 이를 악물고 하루를 살아보는 것 뿐입니다. 왜 저라고 야망과 소망이 없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에 의해 그 모든 것들이 강제로 폭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나요?

그러나 정말 우리에게 완결되고 종결되어진 하느님 나라가 소망으로 주어져 있기에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일어나는 거에요. 그러다 또 넘어지기도 하고 또 말씀 속에서 일어나고 그렇게 하는 거에요.

우리의 사역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까지도 하느님의 손으로 넘어가는데 그게 전부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까지도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수렴되는 일상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물고기가 153마리 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그 153마리의 물고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고 생각을 해요!!!!

 

루가복음 5장의 그이야기와 똑같이요. 그래서 옛날에 우리가 쓰던 모나미 볼펜에 153이라는 숫자가 써 있던 거에요. 진짜로 그 회사는 그 모나미 볼펜 때문에 떼돈 벌었습니다. 그거 안쓴 사람이 있나요? 전부 까맣고 거기에서 153이 뭔지 아셨어요? 여기서 나오는 153입니다. 그 회장님이 그리스도교인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그분이 경영을 잘해서 돈을 번 것이지, 거기에 부적을 붙여서 돈이 벌린 게 아닙니다.

그물에 걸린 153의 물고기 숫자에 대해서 많은 견해들이 있어요. 그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가 에제키엘서 47장의 말씀을 토대로 그 숫자의 의미를 해석한 것인데 한번 보세요.

(에제 47:6-10)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0 그러면 물가에는 어부들이 늘어서고, 엔 게디에서 엔 에글라임까지는 그물을 펴서 말리는 곳이 될 것이다. 그곳의 물고기 종류도 큰 바다의 물고기처럼 매우 많아질 것이다.

이게 무슨 장면인가 하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서 모든 것이 소성케 하는 그런 환상입니다. 요한묵시록 21장에 그 생수의 강이 모형화 되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서 그 물로 인해 만물이 소성케 되는 묵시록 211절부터 죽 설명이 되고있어요. 그런데 그 생수의 강가에서 어부가 그물을 치는데 그물치는 곳이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라고 합니다.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아라비아 숫자를 안썼다 그랬습니다. 히브리어 자음에 숫자를 대입해서 그걸 숫자로 썼습니다. 여기서 엔게디에서 엔은 접두어이고 게디가 17이란 숫자입니다. 에네그라임이 153이에요. 그러면 17은 뭐에요? 1부터 17까지 더하면 153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어부가 그물을 쳐서 거기에 걸리는 것들을 소성케 하기 위해 끌어 올리겠다는 뜻입니다. 아오스딩도 이 견해를 지지했을 정도로 이 견해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 그물로 인해 걸려 올려지는 하느님의 백성 또는 만물을 가리킨다고 결론을 맺었기 때문에요.

그런데 결론은 맞는 것 같은데 그 과정이 영 석연치가 않아요. 조금 전에 보아서 아시겠지만 요한복음에는 간혹가다가 히브리어가 한번씩 나오잖아요. 그럼 반드시 해석을 해주죠. 메시아는 그리스도다. 랍비는 선생이다. 이런식으로요.

왠지 아세요? 당시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거의 몰랐어요. 바벨론 포고 70년 동안에 이들의 언어가 바벨론 언어인 아람어로 다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통용어는 헬라어. 그래서 히브리어는 정말 율법을 연구하던 랍비들이나 선생들 소수들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요한이 이 요한복음의 첫번째 독자가 누구에요? 유대인들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어도 모르는 이사람들에게 이런 어려운 개념을 들어서 153이라는 숫자를 썼다고 하는게 이해가 가세요????

저는 오리겐에 의하면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153종류로 알고 있었다고 그래요. 그 때 당시에 이 세상의 모든 물고기는 153종이다가 그 당시의 학문이 밝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굳이 153마리의 물고기 숫자를 거기에 기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나라와 민족 종족 언어를 초월하여 세계적으로 전파가 되어서 세계 도처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구원받게 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한다라는 거에요.

 

오늘 본문의 이 그림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하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의 구체적 설명이라고 했잖아요. 따라서 물고기 153마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들인 그 교회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오게될 보편적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 입니다.

(1디모 2:4) 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구절은 바오로가 보편적 구원론을 지지하는게 아닙니다. Universalism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14절을 보면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신화와 끝없는 족보와 율법을 경계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초대교회 안에 들어온 그런 유대주의 율법주의를 경계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선민사상, 이것까지 초대교회에 들어 왔거든요.

그들의 그런 유대주의를 경계하라고 하면서 하느님은 모든 백성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라고 말한다하면서 구원은 혈통과 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지 Universalism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물고기가 153마리가 잡혔다는 것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 세상을 건지는 일에 동참할 하느님의 백성들에 의해 건져질 그 세상이 보편적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혈통, 어느 민족에 국한된 그러한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다보니까 6절과 11절에 끌어 올리다 라는 단어가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더라구요.

(요한 21:6, 11)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6절에 그물을 들다11절에 그물을 끌어올리다에 쓰인 단어가 헬라어 헬퀴오 거든요. 그 단어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똑같이 쓰였던 적이 있던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12:32)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여기에서 이끌겠노라 λκύσω helkysō 헬퀴오 똑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이 굳이 그 단어를 여기에다가 2번이나 반복해서 썼습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는 그 장면에 썼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들리면 그리고 승귀하게 되면 그 들리다라는 단어가 그 두가지(십자가에서 들리고, 승천하게되면)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게 들리면 하느님이 선택한 하느님의 백성들이 내게로 이끌려 올라오리라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 단어가 제자들이 그물을 끌어 올리는 장면에 쓰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153마리의 물고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공로 은혜에 의해 구원받게 되는 하느님의 백성들, 그러나 보편적인 하느님의 백성들 153마리로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말고요.

그 제자들의 사역이 그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진행되어질 때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쫓아서 그물을 오른 편으로 옮겼을 때 완전하게 153으로 성취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빵!11말씀의 순종으로 153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일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본문도 구원에 관한 예수님의 주권과 주체성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에 의해 시작이 되고 하느님에 의해 진행이 되며 하느님에 의해 종결이 되는 은혜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열심 앞에서 겸손하게 그분의 이끄심에 순종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부인이고 진정한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인되고 부정되는 것을 어떻게 견딥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수시로 갈릴레아로 끌고 가시고 우리 앞에 수시로 숯불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폭로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니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맞아 그리로 가지 마시고 또 하느님이 나에게 숯불을 대시는 구나 맞아 나는 이런 놈이지 이런 존재지.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은혜가 필요해. 이리로 가시면 되는 거에요.

그렇게 두손 번쩍 들고 하느님 나는 하느님께 항복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자꾸 이렇게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다가 결국 완전히 다 털리고 두손 모두 바짝 들때에 천국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은 무너지는 삶이에요. 찍히는 삶이고 털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워지고 털리시면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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