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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5.0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05 조회수1,699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5월 5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사도 5,27ㄴ-32.40ㄴ-41

그 무렵 대사제가 사도들을

 27 신문하였다.

28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29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30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32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제2독서 묵시 5,11-14

나 요한은 11 어좌와 생물들과

원로들을 에워싼 많은 천사들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백만

수억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이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살해된 어린양은 권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미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13 그리고 나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그 모든 곳에 있는 만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예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화답하고 원로들은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

복음 요한 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

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보좌신부 때 만났던

청년 한 명이 생각납니다.

주일미사에 나온 이 청년을

만나서 청년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처음으로 성당에서 활동을

해보는 것이어서 그런지

또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이 청년은 항상

주변인처럼 생활했습니다.

무엇 하나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마지못해

청년회 활동을 하는 것만

같아서 늘 안타까웠지요.
그런데 몇 달 뒤,

완전히 바뀌어버린

이 청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데

누구보다도 앞장섰고,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시하면서 열심히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없는 성당 안에

홀로이 앉아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몇 달 만에 어떻게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가

될 수 있었을까요?

신앙심이 생겨서일까요?

원래가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그랬을까요? 너무나 궁금해서

청년회 회장에게 그 이유를

 살짝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회 안에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다보니

행동이 바뀐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이려고

또 호감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제까지의 행동을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원래 모습이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바꿔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신앙 안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사람 역시 주님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을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내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고,

주님께서 좋아하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이 부르심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으로 사람의 일을 하고 있으니

단 한 마리의 고기도

낚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세 번째로 부활하셔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졌을 때 비로소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역시 좋아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세상 끝까지

복음을 기쁘게 전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순간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 순간의 에너지가

모든 경계를

넘어 퍼져갈 것이다.

(코리타 켄트)

(콘트라 비츠의 '기적의 고기잡이')


얀테법칙과 라곰

행복 지수가 높은 북유럽 국가가

공통적으로 따르는

생활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얀테법칙(Janteloven)과

라곰(Lagom)입니다.
얀테법칙의 제1원칙은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로

 다시 말해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뛰어난 학벌,

좋은 직장의 구분이 없습니다.

또한 ‘라곰’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함을 의미합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돈 벌어

적당히 행복한 것을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로 여깁니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마음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각자를 인정하며 살 수 있다면,

그리고 적당함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때 모든 이의 행복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에 대한

 특별대접에 집중합니다.

그러다보니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에서 벗어나 자신 역시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특별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을 가졌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주님께서는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행복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혼을 내셨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내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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