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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당신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가? (요한21,1-19)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05 조회수2,291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9년5월5일/주일복음말씀묵상/ † 당신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가? (요한21,1-19)

 

 

 

 

<본문의 개요>

사도 요한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의 나타나심’에 대한 이 보도를 요한복음에 추가했다. 그러므로 21장은 부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현현(顯現, 나타나심) 사건은 모든 현현 사건들 맨 첫 번째 사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나타나심은 요한복음의 방식대로 서술된다. 그래서 이제 시작하는 교회시대를 위한 이 나타나심의 기본적 의미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의 수효가 일곱인 것은(2절) 묵시1,11절의 일곱 숫자처럼 그들이 교회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일을 자기들 뜻대로 해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3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의에 빠져 있는 그들을 부르셔서 자기를 섬기는 일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6절).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이미 루카5,1-9절에서 선교 사역의 풍성한 열매를 상징한다. 그분은 말씀(5절)과 표적(6절)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제자들 가운데는 이해하는 데 재빠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한 사람, 곧 사도 요한(7, 20,8절)과 행동하는 데 재빠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한 사람, 곧 베드로가 있었다(7, 11; 20,3; 6-7절).

 

 

153이라는 수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그 이상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숫자가 가진 의미를 애써 풀이한다면, 1은 하느님을, 5는 4 + 1로서, 사람(4)과 하느님(1)의 연합을, 3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한분이셨던 하느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사람과 연합되시고, 삼위 곧 성자와 성부와 성령의 세 위격을 가지신 한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해석하겠다.

 

 

그렇게도 많이 물고기가 걸렸지만 거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 모인 사람들은 결코 나뉠 수 없는 공동체를 이룬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요한10,16; 17,11,20-23). 이 나타나심의 정점은 부활하신 분이 자기 제자들을 초대하는 식사이다(사도10,4). 이 식사는 주일마다 먹고 떼는 축제를 통해서 이어진다(사도20,7).

 

 

“내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베드로의 말(13,37)과 관련된다. 베드로가 세 번 물음을 당한 것은 그가 세 번 부인한 것과 관계된다(13,38; 18,15-18). 이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허물을 없애주시고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신다.

 

 

1,42절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제 내용적으로 사실이 된다. 베드로에게 돌보라고 맡기시는 어린 양들 내지 양들은 예수의 양들이며 또 예수의 양들로 남을 것이다(15-17).

 

이로써 베드로에게 부여된 위탁의 내용과 한계성이 지시된다. 교회를 설립하던 시기에 베드로가 모든 양떼를 위하여 그 위탁을 어떻게 실현했는지는 사도행전 1-10장에 서술된다. 18-19절은 요한13,36절의 재론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암시하는데, 요한복음이 저술될 당시에는 이 사건은 이미 과거에 속하는 것이었다.

 

 

 

 

<말씀 묵상>

요한21,1-4절은 “이 일들 뒤에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디베랴)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기를 보이셨는데 그분께서 이렇게 자기를 보이시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토마스(도마)와 갈릴래아(갈릴리) 가나 출신의 나타나엘(나다나엘)과 제베대오(세베대)의 아들들과 그분의 제자들 중의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있더라.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그에게, 우리도 함께 가노라, 하고 그들이 나아가 즉시 배에 올랐으나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라.”(원문 참조)고 말한다.

 

 

제자들이 원래 그들의 직업이었던 고기를 잡으러 간 본장의 상황은 그들의 믿음의 타락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중의 한번은 토마스의 일 때문에 더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20,24-29).

여기서 베드로는 “내 양들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아직 그 명령을 이행할 능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 곧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역을 위한 능력의 영, 경륜적인 영이 강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라(3절).”연단의 날에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실감하고 좌절한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그에게, 우리도 함께 가노라, 하고 그들이 나아가 즉시 배에 올랐으나 그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라.” 그들은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

 

 

실망과 절망이 우리에게 새로운 만족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지난 날 내 삶을 돌이켜 보건데, 바로 내가 베드로와 함께한 제자들의 모습이다! 당신이 하는 중요한 실패는 영적 성공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4-6절은 “4 그러나 이제 아침이 될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시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 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대답하되, 없나이다, 하매. 6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너희가 얻으리라, 하시므로 그들이 던졌더니 이제 물고기가 많아 그들이 그물을 당길 수 없더라.”고 말한다.

 

 

부활 후에도 호기심이나 관심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본(만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막달레나 마리아나 엠마오 도상에서 그분을 만났던 두 제자도,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셔야, 곧 계시하셔야만 비로소 그분을 알게 되었다.

주님의 부활의 몸을 본 것도 제자들뿐이었다. 이 이상은 영적 계시이고, 선택된 믿는 사람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은 부활의 아침에 이와 같은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이제 아침이 될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 계시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4절).”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고난과 슬픔의 날이 당신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바로 그 아침에 기쁨이 왔다. 주님이 그곳에 계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스도 자신을 피한 사람에게 그분께서 그분을 나타내실 때마다 새로운 아침이 등장한다. 눈이 열려 그분을 보는 사람마다 천국의 아름다운 아침을 보게 되며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대답하되, 없나이다, 하매.”이것은 실패에 대한 정직한 대답이다.

 

 

그들은 잡은 것이 한 마리도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이들은 잡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분께서는 그러한 이유로 제자들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셨다. 이들은 허세와 과장이 없이 솔직하게 주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축복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실상에 관심을 가지신다. 아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너희가 얻으리라(6),” 이들은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이들은 절망에 빠졌다. 그와 같은 절망은 하느님의 축복을 얻는 기회가 된다.

해변가에서 그 나그네의 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순종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언제나 연관성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는 것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너희가 얻으리라, 하시므로 그들이 던졌더니 이제 물고기가 많아 그들이 그물을 당길 수 없더라.”이들은 순종하였다. 이들의 믿음은 풍성하게 보상을 받았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 중의 은총이다. 순종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이와 같은 은총이 주어진다. 우리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리시는 주님을 믿어야 한다(로마4,17).

 

 

7절은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그분은 주시라, 하니 이제 시몬 베드로가 그분이 주시란 말을 듣고는 (벗고 있었으므로) 어부의 덧옷을 걸친 뒤 바다로 뛰어들더라.”고 말한다.

이 표적으로 요한은 “주(주)시라”고 하였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이다. 요한은 주님만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안다. 요한의 눈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주시라”고 외친 것이다.

 

우리의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의 사역이다. 우리 죄인들도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변화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원리이다.

 

 

8-11절은 “다른 제자들은 (땅에서 멀리 있지 않고 이백 큐빗쯤 되는 곳에 있었으므로) 작은 배를 타고 가서 물고기가 담긴 그물을 끌고 오니라. 9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바로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았는데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있고 빵도 있더라.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지금 너희가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시매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큰 물고기가 가득한 그물을 땅으로 끌어당기니 백쉰세 마리나 있더라. 거기 있던 모든 것이 이같이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바로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았는데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있고 빵도 있더라(9).”이것은 자신의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보살핌의 다른 증거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배고프게 굶주린 제자들에게 대하여 관심을 가지셨다. 이것은 큰 잔치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의 양들의 목자로서 이들에게 합당한 은총을 알게 하신 것이다.

 

 

필리4,19절은 “나의 하느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분의 섭리적인 대비함으로 언제나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이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우 귀한 은총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풍성을 따라 우리를 공급하신다. 그분의 풍성은 우리의 필요를 훨씬 능가한다.

 

 

12-14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와서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그분이 주신 줄 알므로 아무도, 선생님이 누구시니이까? 하고 감히 그분께 묻지 아니하더라. 13 이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빵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제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부터 일어나신 뒤에 세 번째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를 보이신 것이더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와서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그분이 주신 줄 알므로 아무도, 선생님이 누구시니이까? 하고 감히 그분께 묻지 아니하더라. 이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빵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주님만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 이 세상에서 주님 외에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역사하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은총과 능력을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는 주시는 방법을 아신다. 그것으로 그분은 자신을 알게 하신다. 그분은 이와 같은 자세로, 그분 자신을 위하여 사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사시고 죽으셨다.

율법은 무엇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된 축복을 얻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는 것마저도 복된 일이 되게 하신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태22,4절은 “다시 다른 종을 보내며 말씀하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잔칫상을 준비하되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라고 말한다.

 

 

15-17절은 “15 이처럼 그들이 먹은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이들이 식사를 한 다음에 주님은 다른 방법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세 가지 질문으로 베드로의 마음의 비밀을 살피셨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를 알려고 한 것이었다. 그분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이것은 복음 사역을 위한 베드로의 마지막 시험이다. 이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관계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마음의 헌신이 없이는 참된 사역자가 될 수 없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으로 인하여 그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권고와 사명을 받았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15절, 원문 참조), “내 양들을 목양하라”(16절, 원문 참조), “내 양들을 먹이라”(17절, 원문 참조)고 각각 말씀하셨다.

 

이 구절들에서 "어린양"과 "양들"은 교회를 가리키는 집합명사인 양무리를 지칭한다. 목양은 교회(사도20,28)인 양무리를 위한 것이다(요한10,14-16). 주님은 양을 먹일 뿐 아니라 목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시편 23편에 의하면,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부드러운 풀밭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목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양을 먹이는 것을 관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양은 먹이는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이리가 오면 양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편 23편에서 목자는 양무리를 해치는 어떤 것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막대기와 지팡이를 갖고 있다.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주님을 목자장으로 여기고 자기를 포함한 모든 장로들을 하느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목자들로 여겼다(1베드5,1-4).

 

 

어쨌던 주님의 이 질문은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베드로의 양심과 가슴은 당시에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베드로의 답변은 예수님의 질문에 전적으로 긍정하는 것임도 기억해야 한다.

 

 

18-19절은 “18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가 네 손을 내밀 터인즉 다른 사람이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가리라, 하시니라. 19 그분께서 그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표적으로 보여 주시며 이것을 말씀하시니라. 그분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신 후에 예언을 말씀하신다. 이 예언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엄숙한 표현에 의해 시작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내가 네 손을 내밀 떠이니(팔을 벌리리니)”곧 팔을 벌린다는 표현은 초대교회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 위임과 책임을 위하여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은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15-17절), 그리고 “고난당하는 것”(18절), “나를 따르라”(19절)는 것이었다. 특히 이 책임은 양떼들 위에 군림하는 책임이 아니라 섬길 책임임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분께서 그가 어떤 죽음으로” 후에 베드로는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2베드1,14절은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고 말한다. “장막을 벗어”는 육신적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베드로는 그의 죽음에 대한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여기서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에게 속한 어떤 것이나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만 그분을 죽기까지 따르도록 준비시키려고 하신 것을 본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주님께서 티베리아스(디베랴) 호숫가에 나타나신 사건에는 매우 주의 깊은 의도가 있었다는 암시가 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물고기가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수많은 물고기들이 잡혀지자 사도 요한은 루카복음 5장에서의 그 사건을 기억해 내는 동시에, “주(主)시라”고 외치며 요한의 영적인 눈이 열린 것이다.

 

 

그러자 역시 그 사건을 연상하고 있던 베드로는 벅차고 기뻐서 배에게 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고기를 많이 잡은 일은 이전에 루카복음 5장에서의 그의 헌신을 생각나게 했고, 숯불은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을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요한18,18; 루카22,55-56).

 

 

음식을 준비해 놓고 그들이 배고픔(필요)을 채워주시는 주님에게서 그들은 그 따스하고 변함없는 사랑과 이에 비교되는 자신들의 불신실함으로 몸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특히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었고(마태26,35),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늘 근심하고 슬퍼하고 있었던 베드로에게는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매우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첫째는 공적(公的)인 필요성이다. 비록 그가 주님을 부인했었지만, 주님 자신이 다시 그를 사도로 회복시키심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하셨던 것이다. 그 증인은 베드로를 제외하고 6명이나 되었다. 둘째는 베드로의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였다. 부활하신 후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사건에 관하여 아직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는 잘못된 행위로 인한 자기와 주님의 관계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에 대하여 근심과 불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치유되었다. 그 일에 대하여 베드로가 스스로를 책망하고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근심해 왔으나, 그분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다만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대화를 주도해 가신다.

 

 

루카2,30-32절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라고 말한다. 베드로가 다시 자유함과 평화를 얻었고, 주님의 사랑과 그 말씀의 참됨을 깊이 확인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한 사람을 향한 주님의 자비하신 태도를 배우게 된다. “당신(나)도 이렇게 용서하며 포용하고 격려해야 할 사람이 주위에 존재하는가?” 당신은 종교라는 굴레와 타성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당신은 영적인가? 아니면 망상 속에 있는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마태16,24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따랐듯이, 우리 또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오늘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분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눈을 열어주시는 은총이 있기를 기도드린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을 참조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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