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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한 영성체 (5월 10일 가르멜 수도원 새벽미사 강론)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11 조회수1,409 추천수1 반대(0) 신고

 

 

<금요일 가르멜 수도원에서 들은 복음과 관련된 강론 내용입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은 아주 영적으로 깊은 내공이 있는 강론이라 사실 어렵습니다. 나름 최대한 신부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말씀의 표현을 조금은 달리 표현을 한 곳이 있지만 최대한 그동안 이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영적인 말씀을 토대로 해서 최대한 전달했습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신부님의 허락을 받지 않아서 그냥 신부님의 성함은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으면' 에서 내 살과 피는 진짜 살과 피입니다. 이 앞전에 강론했지만 '이다' 라고 나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야지 은유적으로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내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뭐냐 하면 나 자신이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또 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체를 영하면 내가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이 내 안에 머무르는 그게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체는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가 영성체를 하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게 될까요? 나의 믿음과 영적인 상태와는 무관하게 관계없이 성체를 영하면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이 우리 안에 또 우리가 주님 안에 계시게 되는 걸까요?

 

신자가 아닌 사람이 실수로 성체를 모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계시고 그 사람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걸까요?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성체를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우리가 아직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모신 성체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영원한 생명은 곧 충만함이고 기쁨인데 우리는 그렇게 많이 성체를 모셔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의 충만함과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많은 신자들은 내가 성체를 모시기만 하면 자동으로 내 안에 예수님이 머무시는 걸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상당히 순진한 생각이고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성체를 물질화 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인식체이지 물질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물질화 해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생각할 때 현존이라는 이 개념은 말이죠 '공동체적' 이라는 이 개념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주적인 현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사랑으로 현존해 있다는 걸로 일단 알아들으시면 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은 공동체적인 현존이라는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 계신 예수님의 참 현존 장소가 어디인가를 정확하게 지정하기 위해서 묵상해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체 안에 현존하시고 계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걸 한번 묵상해보시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캄캄한 감실 안에 갇혀 계신 예수님이 그 안에 계셔서 깝깝해 하시는 예수님을 상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현존을 물질화 한 것입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참 현존은 공동체적인 현존이고 사랑의 현존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마음이 열려야만 모든 인간을 국경도 없이 아무런 제한도 없이 대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전 인류에게 열려계시고 전 역사를 품고 계시는 참 그리스도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체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라고 했습니다. 모든 시대와 모든 세대와 죽은 사람도 포괄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사람이라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 되어 있는 모습의 사람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로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성은 언제나 우리 각자 안에 현존합니다. 주님의 인성의 현존이 우리 앞에 멈춘 적이 없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현존하지만 내 자신이 그 안에 현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실 때 제자들을 동반하셨죠. 주님의 인성이 늘 우리를 동반해도 주님께서 늘 우리 안에 계셔도 우리의 눈은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감겨있어서 그리스도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현존하지 못해서 주님을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님의 현존에서 벗어나 있어서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체의 신비란 주님이 현존하고 계신다는 이 현존 앞에 우리 자신을 열고 그 현존을 우리 안에 감돌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이 내 안에 스며들어서 그 현존을 내가 느끼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금방 잊어버려도 됩니다.

 

지금 성당 안에 많은 전파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핸드폰을 열어서 클릭만 하면 인터넷에서 나오는 정보를 다 볼 수 있듯이 주님의 현존은 신성과 인성을 통해서 언제나 현존합니다. 성변화(아마 미사 때 제병을 축성하실 때 그때의 '성변화' 라고 하는 말씀일 걸로 사료됩니다.)란 이미 거기에 계셨지만 우리가 잡을 수 없었던 그 전파를 잡기 위해서 핸드폰을 열어 클릭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거기 계셨던 현존에 우리 자신을 그 현존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는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사는 언제나 보편적인 것입니다. 미사는 모든 죽은 사람, 모든 산 사람을 위해서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한 대를 봉헌한다고 해서 미사 한 대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전 우주를 위한 미사라서 그렇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한없이 우리 자신을 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무한히 여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는 영성체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는 영성체가 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도 성체를 내 삶의 온화한 태양이라고 했습니다. 성삼위 엘리사벳은 하루하루의 태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찬례는 우리의 태양입니다. 태양이 우주를 비추듯이 하느님의 현존은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래서 영성체는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성체가 예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마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안에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한다고 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를 포함해서 어느 사람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그런 상황 속에서 미사가 만약 봉헌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때 미사는 독성밖에 없는 미사가 됩니다. 그런 미사는 그리스도를 물질적으로 잡으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법 주문에 복종하는 일종의 우상으로 축소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의 전례는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안에 붙잡고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한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머무는 거라고 한 표현 그 현존이 바로 이 사랑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내가 내 안에 이런 사랑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이 정당한 미사가 됩니다. 다행히도 교회 안에는 주님의 이 현존을 사랑의 화덕처럼 빛나게 할 영혼이 언제나 하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미사는 미사가 아니고 독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사 때 사랑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미사가 유효한 미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성체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분으로 변화시켜서 우리의 삶이 사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성체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그분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변하게 해 주는 게 영성체를 한다고 할 때의 진정한 영성체입니다. 제가 어제 물었죠? 영성체 후에 무슨 기도를 하는지 말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우리를 이런 사랑으로 살겠다고 예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가 영성체를 하지만 그 영성체가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불행하게도 많습니다. 영성체를 하고도 온종일 남을 험담한다면 날마다 영성체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와 무관한 걸 하게 된다면 영성체를 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삶의 정수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핵심이 성체적인 삶입니다. 전례헌장에서도 전례의 정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의 현존에 우리가 진정으로 현존하고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이 되어 날이면 날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드높아지도록 해야 할 겁니다. 이런 노력없이 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우상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거는 우리가 하는 믿음 생활에서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미신도 사실 믿는 것입니다. 다만 잘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몰라서 그렇지 교회 안에 우리가 잘못 알고 하는 미신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체를 영하면서 오늘도 어제보다 좀 더 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배하고 그 마음으로 살도록 결심을 함으로써 이게 반복하는 것이거든요. 외형은 안 바뀝니다. 마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쇼펜하워가 반복이라는 이름의 책을 한 권 낸 게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반복이 우리의 삶에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를 의식적으로 변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보면 외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하는데 외적으로 향하는 것을 돌려서 내 마음을 계속 들여다 보며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되도록 노력하는 게 바로 이런 반복을 통해서 내 자신이 성화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내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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