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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5.15)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15 조회수1,851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9년 5월 15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 12,24―13,5ㄱ

그 무렵 2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25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4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5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복음 요한 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어느 남녀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조난을 당했습니다.

각자 튜브에 의지한 채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자는 아주

 여유로워 보입니다.

어디서 맥주를 구했는지

맥주를 마시면서 구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렇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시는 이 남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같이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섬을 찾아서

혼자 헤엄을 칩니다.

나는 반드시 ‘살 것’이라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말입니다.
누가 구조되어서 살았을까요?

결과는 둘 다 구조되어 살았습니다.

이 여자는 억울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열심히

헤엄을 치는 노력을 기울여서

구조되었지만, 이 남자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맥주만 마셨는데

구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남자가

너무나 미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구조되기가 쉽겠습니까?

여자에게도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구조된 듯 한 착각 속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깨닫지 못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과를 이룬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사람을 부정하고 원망한다면

이로써 자신에게 다가온

행복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는 불공평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습니다.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사랑으로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게 딱 맞게

다가오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주님께서는 빛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우리들을 비추십니다.

빛이신 주님이 늘 함께 하시기에

이 세상은 희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여전히

판단하면서 불공평하다는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내게 다가온 주님의

사랑이 보일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이미 다가온 행복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빛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다른 이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로 내 자신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사랑만을 바라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고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희망을 내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오늘도 희망차게

하루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져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헬렌 켈러)

(주님께서는 늘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진짜 관계

진짜 관계는 어떤 유익을

 논하지 않습니다

 ‘함께 존재하는 강한 유대 감정’을

바탕으로 감정과 생각을

나누고 소통합니다.

하지만 유익이 논해지는

관계에서는 그 안에서 큰 아픔과

상처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 신앙, 이웃과의 관계

모두 그렇습니다.
무엇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요구가 늘어날수록 서로가

느끼게 되는 아픔이

견딜 수 없이 커지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요?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관계한다면

분명히 그 안에서 아픔과

상처가 멈추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냥 있음만으로 좋은 관계가

 진짜 관계입니다. 불가능할까

요? 우리는 그 체험을

 이미 해왔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갓난아기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존재 자체에

감사했고 기뻐했습니다.

 동시에 갓난아기도

무조건 부모를 찾으며

근처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분과 있을 때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마음에 드는 이성 친구를

 만났을 때 그냥 같이만

있어도 좋았습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냥 성당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진짜 관계는 완벽함을

 논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을 수

있다는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관계입니다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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