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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5.2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29 조회수2,469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9년 5월 29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 17,15.22─18,1

그 무렵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복음 요한 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두 가지의 세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세상은 여러분 1년 수입이

 5,000만원이고,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 절반인 2,500만원입니다.

두 번째 세상은 여러분 1년 수입이

1억이고, 다른 사람들의 수입은

그 두 배인 2억입니다.

이 두 세상의 물가는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세상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조사는 1998년 하버드대학을

 포함해서 학계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50% 이상이 첫 번째 세상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는

두 번째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게 되는 첫 번째 세상을

선택하더라는 것입니다.

 물가가 같다면 비록 다른

사람보다는 수입이 적어도

더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을

선택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소비를 할 수 있는 비용이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서열의 위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더 높은 서열에

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경쟁에 동참하면서

결국 불행에 가까워집니다.
경쟁과 비교의 삶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욕심을 자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경쟁자로

바라보지 않게 되고,

나를 이해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아니라

 원하는 게 적은 사람이 부자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좀 더 쉽게 진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즉, 잘못된 생각과 판단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 세상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살게 하면서 주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해서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이끄심에 동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나의 동반자이며 협조자라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쟁자이고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 정도로 이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령을 받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바로 내 자리가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곳이 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어쩌면 ‘사랑’에

가장 가까운 말은

‘가만히’가 아닐까.

거기 가만히 있어도

삶의 이유가 되는 그런 사랑...

(서영식)

(오늘은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내 편

모든 사람이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나’를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완벽하게 이해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내 편’들이 있습니다.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밖에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편이 되어 줍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이해를 해주는

 내 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내편에 서지 않고

 반대편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남’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조금의 이해라도 해주려고

노력하는 ‘내 편’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내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정말로

고마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고마운 내 편이 계시네요.

 늘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

주님입니다

(문창우 비오 주교님과 가톨릭 교장단 연수에

참석하신 신부님들과의 미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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