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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5.3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30 조회수2,141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9년 5월 30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2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복음 요한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이 겸손의 덕을 완벽하게

갖추기란 사실 쉽지 않습니다.

벤저민 플랭클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완전히

습득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겸손한 척하는 법을 배웠다.”
겸손을 가장한다는 것,

 어쩌면 진정성이 없기 때문에

가짜 겸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플랭클린은 우리가 쓰는

가면으로 인해서 진짜 자신도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익히기 힘들지만

그런 시늉들이 반복되면서

점차 내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예전의 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제 모습은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머니가 깨워주기 전에는

일어나기 힘들었고,

청소나 방 정리도 하지 못했습니다.

게을러서 미루기 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으로 인해서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앞서서 하려고 했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려는

 척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다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제게 성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현재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고 있으며,

20년 가까이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불러만 준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강의를 합니다.

 예전의 게으른 모습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한 척 했던 삶이

저의 원래 모습인 것처럼 비춰집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척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때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원하는 모습이

고개를 내밀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불가능한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미리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하려는 그래서 고통과 시련에 대해

좌절하지 않고 항상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주님의 배려였습니다.
자신감을 잃는다는 것은 내 인생을

어렵게 만드는 장애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러한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이렇게 항상

배려해주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자신을 믿는 순간

어떻게 살아갈지 알게 된다.

(괴테)

(사진작가 분이 성지에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변화.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50:50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연구 결과를 보면

아주 의외입니다. 글쎄 85% 정도가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긴 아주 잘 생긴 배우가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고,

특별한 능력으로 이름을 알리는 사람도

자신의 부족함에 힘들어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나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다.’
걱정을 사서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자존감이 사회적 성공, 행복, 일상생활의

장애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오히려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자존감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85%나 되니까 당연하지 않을까요?).

또한 자존감 높은 사람이

일상생활을 더 잘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아도취에 빠져서

남 이야기를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책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에 대한 고민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해보십시오.

분명히 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변화를 늘 도와주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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