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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 열매와 인조 열매! (요한15,1-8)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03 조회수1,934 추천수0 반대(0) 신고

요한15,1절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십니다.”라고 말한다. 포도나무는 원래 하느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시편80,8), 애석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배반하여 “낯선 들포도나무로(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변해 버렸고(예레2,21), 농부가 만족을 얻을 만한 열매를 맺지 못했으나, 하느님은 다만 그것을 잠시 버려두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무리의 백성, 곧 참되고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열매를 맺어 그분을 만족하게 하라고 요구하셨다. 따라서 주님은 그 유명무실한 나쁜 포도나무가 아니라,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실맺음의 전제이며 또한 기도 응답의 조건이다(15,7).

 

 

 

 

2절은“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잘려진 가지는 믿지 않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바로 주님께 속하고 주님 안에 있다는 망상 속에 사는 이름뿐인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은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잘려져 마른 가지가 되어, 구원은 받았으나 천국 안에서 “바깥”어둠 속으로 버려져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5,30). “다 쳐내시고”는 가지가 잘린 이후로는 주님과의 교통과 생명의 공급을 잃어버려 마른 가지가 되어, 주님의 재림 후에 데려다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우리와 주님 및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고 한 덩어리가 되었음을 표현한다. 그러나 재배하는 사람인 농부가 포도나무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열매는 바로 포도나무의 생명의 흘러넘침이다. 포도나무에 싹이 나고, 가지가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 모두가 그 생명의 흘러넘침을 나타내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그 생명의 가장 높은 흘러넘침으로 농부를 가장 만족하게 한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15,4절). 가지의 생존 조건은 바로 먼저 포도나무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포도나무도 가지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 맺음의 순서요, 조건이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생명의 교통의 원칙이다! 주 안에 있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다. 먼저 객관적인 모든 것이 있은 다음에라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는 체험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주관적인 것이다. 모든 주관적인 진리는 다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다. 곧 성령의 역사만 있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당신 밖에 있는 것들은 모두 객관적인 것이나 성령이 오셔서 당신 안에 거하실 때 객관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먼저이고 성령은 나중이다. 성령은 주님이 이루신 모든 것들을 우리 몸에 성취하게 하신다. 이 말씀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한 포도나무 가지의 일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항상 붙어있어 포도나무의 진액, 곧 포도나무의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는 일이다. 늘 가지는 포도나무와 하나여야 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의 교통이 끊기면 그분의 진액인 생명의 공급이 중단된다. 발전소와 전기의 예를 들어보자. 전기는 발전소에서 송전탑과 변전소를 거쳐 가정에 공급되지만,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 전기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위치를 켠다는 의미는 그분과의 교통 안에 있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돌이키는 훈련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으로 돌이키는 훈련이란 무엇인가? 영 안에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말씀을 묵상하고 관상하는 일이다. 가정에서 전기를 사용하기 위하여 스위치를 올리듯이, 늘 우리의 삶 중에서 스위치를 올려 하느님과의 교통을 유지해야만 그 생명의 끊임없는 공급으로 우리의 혼(생각, 감정, 의지)의 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변화이며 완전한 치유이다! 이것만이 타고난 옛 사람인 우리의 혼 생명을 십자가의 죽이는 효능으로 말미암아 유기적인 구원을 완성케 하여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 부분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로마서 연구’의 유기적인 구원 편과 ‘신심이 깊어지도록 자신을 단련하라’(영의 훈련)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두 번째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위하여 포도나무 가지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일은, 가지에 풍성한 포도 열매가 열리도록 포도나무에서 받는 진액을 끊임없이 열매에 공급하는 일이다. 가정의 냉장고에 전기가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음식물이 부식되어 버리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열매 맺음을 위하여 가지는 열매에 계속 자양분을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처음은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자양분, 곧 생명을 공급받는 일이고, 다음은 그 생명을 가지가 열매에 부단 없이 공급해야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지에게는 포도나무로부터 부단 없는 생명의 공급받음과 열매 맺음을 위한 생명의 공급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가지의 십자가이다!

 

 

 

생각해보라. 사실 포도나무 가지에게는 이 생명의 공급받음과 생명의 공급을 방해하는 수많은 시험 또는 시련들이 존재한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포도나무 가지는 가뭄, 태풍과 비바람, 충분한 거름주기, 각종 해충과 전염병, 동물들의 침입, 적당한 수확의 시기 등등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가지가 되고 만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때, 그 가지는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신다(요한15,2).”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는 열매를 맺는 것 이외에는 다른 나무들처럼 목재로 쓸 수도 없고 꽃도 없다. 어쩌면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쓸모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다른 쓸모가 없다! 다만 제비가 새끼를 안을 수 있음같이 영적인 생명을 번식할 수 있을 따름이다(시편84,3).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쉼 없이 열매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 외에는, 곧 생명만을 직시하면서 그 외의 일체의 가지만의 번성을 포기하는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가지의 영광을 포기하고, 오직 생명을 통로가 될 때만이, 가지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15,8절에서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복음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다. 이 복음서에서 복음 전파는 열매 맺음으로 대치된다! 열매 맺음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이 표현된다! 그러므로 열매 맺음 안에서 그분이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조 열매’를 산출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갈망은 우리가 생명의 방식으로만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명이 표현되는 것, 곧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모든 활동과 일은 ‘인조 열매’이다! 교회 안에서의 각종 운동들, 수많은 각종 사업과 단체들, 인본주의적 신념과 주장들은 생명에 속한 주님의 길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니다!

 

 

 

만일 당신에게서 생명의 흐름이 없다면, 그것은 ‘인조 열매’들이므로 아버지께서 종국에는 틀림없이“다 쳐내신다(15,2).” 주님의 갈망은 우리가 풍성한 참 열매만을 맺는 것이다! 포도나무의 열매 맺음은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되심이다. 포도나무를 통한 신성한 생명의 번식은 아버지의 영광스럽게 되심, 곧 그분의 표현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열매 맺음 안에서 아버지의 생명이 표현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열매 맺음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스럽게 되심이다. 우리의 열매 맺음은 안으로부터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표현이다! 오늘날 삼위일체 하느님은 우리의 생명과 본성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 안으로부터의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과 본성의 표현이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가진 신성한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열매 맺음 안에서 표현될 때,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신다.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버지가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열매 맺음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 맺음은 우리의 일상의 삶이다! 신성한 생명이 번식하고 번영할 때 이 생명이 표현된다! 만일 우리가 포도나무의 확장과 포도나무의 열매 맺음에 관한 이상을 본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곧 성령으로 하지 않는 복음의 전파나 교회내의 그토록 많은 잡다한 사업들과 단체들(하느님의 이름으로 설립된 그 많은 신문사, 복지시설, 학교 등등)! 

특히 사탄이 왕 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자고 냉소와 거짓과 붉은 깃발의 무리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시키고 있는 이단들!

이들에게 저항한다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스스로 분열하여 이제는 태극기를 몸에 감고 정치 세력화되고 있는 소위 평신도 지도자들! 이들 교회 안의 거짓 세력들은 편협한 불의의 종들이며 더 이상 불필요한 존재들임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타고난 활동은 필요하지 않다! 신성한 생명의 방식이 아닌 것은 모두가 ‘인조 열매’이다! 우리 자신의 타고난 본성 안에서나 종교적인 활동 대신에, 우리는 단순히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을 살 필요가 있으며, 그럴 때만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나무의 번성과 열매 맺음의 그림처럼 그리스도를 사는 방법을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겠는가? 왜냐하면 생명의 문제는 방법상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기는 생명을 누리지만 방법을 묻지 않는다. 아기가 부모에게 결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도 숨 쉬고 잠자고 운다. 생명의 문제에는 방법이 없다. 생명은 다만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적이 없지만 그러나 생명을 산다.

 

 

 

그러므로 어설픈 지식이나 이념은 사실 생명을 방해한다. 어떤 사람도 눈물을 흘리는 방법이나 눈물을 멈추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살고 있다면 방법을 묻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를 살 것이다! 생명은 매우 실제적이지만 매우 비밀하며, 단순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생명은 다만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생명을 살 때, 우리 주위의 어떤 사람들, 소수의 주님의 숨겨진 사람들은 우리가 신성한 생명을 사는 사람들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매혹되고, 확신하게 되고, 굴복될 것이다! 이 신성한 생명이 그들 위에 빛을 비출 것이며, 마침내 아버지의 생명이 그들에게도 분배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 맺음은 신성한 생명을 포도나무 가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태어나게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열매 맺음 안에서 신성한 생명을 표현하면 할수록 더욱 더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생명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단 한 가지는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영의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곧 영으로 돌이켜 우리 영 안에 계시는 성령을 주목하는 것이다.

 

 

요한4,24절은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예배해야 합니다(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닌 우리의 영 안에서, 또한 제물들이나 의식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 하느님, 곧 성령을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의 영은 성령이며, 뒤의 영은 사람의 영이다. 우리의 영 안에 계시는 성령을 접촉하는 것이 참 예배인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진실은 영이 하느님을 접하는 것이며, 영이 하느님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느님과 관계되는 모든 것은 영 안에 있다. 진리의 영은 곧 실재(reality)의 영이다. 그러므로 영적 실재는 성령 안에 있게 마련이다. 오직 성령 안에 있는 것만이 영적으로 참이며, 이는 모든 영적인 것이 성령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을 참고 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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